제국의 회계 1화 — 불에 타지 않는 것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우리는 배웠다. 월급명세서에 찍힌 금액, 청구서에 적힌 합계, 통장에 남은 잔액—그 숫자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누가 어떤 기준으로 결정했는지 대부분의 사람은 모른다.

기원전 3100년 우루크의 직조공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매달 줄을 섰고, 서기가 새긴 숫자만큼 보리를 받았으며, 그 숫자가 어떻게 정해졌는지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아도 됐다. 아니, 묻기 어려웠다. 숫자는 판에 새겨져 있었고, 판에 새겨진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나부-아타는 그 판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기원전 3100년, 우루크. 해가 뜨기 전부터 그는 신전 창고 안에 나와 있었다. 전날 밤 물에 불려둔 점토 덩어리를 꺼내 무릎 위에서 납작하게 누르고, 갈대 촉을 비스듬히 세워 첫 번째 쐐기를 새겼다. 어제 들어온 보리의 양, 오늘 나갈 보리의 양, 받는 사람의 이름. 손바닥에 점토의 서늘한 감촉이 올라왔고, 창고 밖에서는 아직 어둠이 걷히지 않았으며, 곧 일꾼들이 줄을 설 것이었다. 판이 마르기 시작했다. 서둘러야 했다.

그가 일하는 이난나 신전은 순수한 종교 기관이 아니었다. 창고이자 은행이었고, 지금으로 치면 기획재정부와 비슷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우루크는 당시 인구 4만 명 내외로 추산되는 세계 최대의 도시였고, 그 도시를 먹여 살리는 보리가 모두 이 창고를 거쳐 들어오고 나갔다.

시를 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보리를 세기 위해서였다. 가장 오래된 점토판에 새겨진 것은 창조신화가 아니라 재고 목록이었고, 인류 최초의 문자 기록은 신에게 바치는 찬가가 아니라 보리 배급 영수증이었다. 문자는 영수증을 위해 탄생한 것이다.


쿠심이라는 이름이 역사에 남아 있다. 나부-아타와 같은 시대, 같은 신전에서 일한 실제 서기였다. 37개월 동안 그가 관리한 보리는 29,086 단위, 약 13만 5,000리터였는데, 놀라운 것은 양이 아니라 방식이었다. 쿠심은 여러 담당자에게 보리를 나눠준 뒤 뒷면에 합계를 따로 적어 책임 소재를 분명히 했다. 점토가 마르기 전에 새겨야 했고, 그 서두름은 나부-아타의 손이 알던 것과 같았다. 앞면에 지출 항목, 뒷면에 합계.

오늘날 관점에서 보면 가장 초기적인 장부 방식의 흔적이다. 이 기법은 훗날 13~14세기 이탈리아 상인들이 독자적으로 발전시켜 유럽 전역에 퍼뜨렸지만, 쿠심은 그보다 4,500년 가까이 앞서 이미 같은 원리로 장부를 쓰고 있었다.

이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을 보면 지금의 국가와 놀랍도록 닮아 있다. 우루크에서 대량 생산된 경사진 테두리 그릇이 메소포타미아 전역에서 발견된다. 학계는 이 그릇이 표준 배급 단위였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한 그릇이 하루치 보리에 해당했고, 그것이 하루치 노동의 대가였다.

보리를 원하는 사람은 장부에 이름을 올렸고, 장부에 이름을 올린 사람은 신전의 질서에 편입됐으며, 복종은 보리로 구매됐다. 군대가 아니라 배급이 사람들을 묶었다.

그런데 쿠심의 판 하나에 이상한 대목이 있다. 앞면 거래를 전부 더하면 3,910그릇이어야 하는데 뒷면에는 3,895라고 적혀 있고, 담당 감독관도 확인 서명을 했다. 15그릇이 사라진 것이다. 단순한 계산 실수였는지, 쿠심과 감독관이 눈을 맞추며 서명한 것인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15그릇이 사라진 신전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더 조용한 방식의 소멸이 진행되고 있었다. 기원전 2351년, 라가시의 바우 신전, 루가타라는 서기가 존재했다 치자. 그는 매달 배급일을 맞았을 것이다. 직조 공방을 중심으로 한 2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줄을 섰고, 루가타는 이름 하나하나 옆에 숫자를 새겼다. 성인은 한 달에 30~40 실라, 아이는 20 실라였는데, 1 실라가 약 1리터였으니 성인이 받는 보리는 생존에 딱 필요한 만큼이었다.

루가타의 손이 새기는 숫자는 기록이 아니라 판결이었다. 직조공들이 짠 천은 상인에게 팔려 은이 됐고, 그 은은 신전 건축과 의식에 쓰였으며, 직조공이 손에 쥐는 것은 그 순환에서 가장 작은 몫이었다. 신전은 자비로운 고용주처럼 보였지만 정밀한 착취 기계였다.

라가시의 기록에서 여성 직조공의 할당량을 남성 노동자 배급과 비교하면 체계적으로 낮게 책정되어 있었는데, 숙련도의 차이가 아니라 성별에 따른 차등이었다. 루가타는 알았을 것이다. 매달 직접 숫자를 새겼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판에는 이의의 흔적이 없다.

할당량을 못 채운 사람들의 이름은 판 맨 아래에 따로 적혔는데, 그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기록에 없었다. 장부는 배급만 기록했고, 장부 밖의 일은 장부에 없었다. 국가가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처음부터 적히지 않았고, 따라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됐다. 이것은 라가시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같은 시기 북쪽에서는 더 큰 야망을 가진 왕이 이 시스템을 제국 전체로 확장하려 하고 있었다.


기원전 2094년경, 우르의 왕 슐기는 제국 전체의 세금 제도와 달력과 도량형과 서류 양식을 하나로 통일했다. 전국의 총독들이 매달 같은 양식으로 보고서를 올렸고, 우르 3왕조 시대에 발굴된 점토판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만도 수만 장에 달한다.

지금으로 치면 국세청과 통계청과 기획재정부를 하나로 묶은 시스템이었다. 숫자만 보면 완벽했다. 슐기가 자신을 살아 있는 신으로 선포했을 때, 그 선포가 터무니없게 느껴지지 않을 만한 규모였다.

그런데 그 완벽한 장부들이 담지 못한 것이 있었다. 기원전 2400년경 수메르 남부의 보리 수확량은 헥타르당 약 2,537리터1)였는데, 기원전 2100년에는 1,460리터로 줄었다. 약 300년 만에 42퍼센트가 줄어든 것이다. 관개를 반복할수록 소금이 흙 속에 쌓였고, 수확이 줄면 더 많은 땅을 갈아야 했으며, 더 많이 갈수록 소금은 더 빨리 쌓였다.

라가시에서도 우마에서도 수확량이 줄었다는 보고가 올라왔지만 그 보고서들은 서로 연결되지 않았다. 수만 장의 판은 각자 자기 창고 이야기만 했고, 그 균열은 제국의 변방에서 먼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란 고원 동쪽에 자리한 엘람 왕국은 오래전부터 메소포타미아와 교역하며 수메르의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수확량이 줄고 굶주림이 번진다는 소식은 엘람에도 닿았고, 그들은 수십 년째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창고 안에서 무언가가 조용히 썩어가는 동안, 성벽 밖에서는 눈이 쌓이고 있었다.


기원전 2004년, 엘람 군대가 우르의 성문을 두드렸을 때 역사책은 이것을 군사적 패배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성문이 열리기 훨씬 전부터 제국은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

슐기의 증손자 이비-신 시대에 보리 300리터의 가격은 은 1세켈이었으나 제국이 흔들리자 곡물 가격은 수십 배로 치솟았다. 아모리인의 침략이 농업 기반과 관개 시스템을 무너뜨리면서 기근이 번졌고, 사람들이 굶기 시작하자 일꾼들은 도시를 떠났다. 그리고 엘람 군대가 도착했을 때, 성벽 안은 이미 반쯤 비어 있었다.

슐기에게는 수만 장의 판이 있었고, 토양이 망가지고 있다는 신호도 그 안에 흩어져 있었다. 만약 그 신호를 읽어서 관개 농업을 줄이기로 결정했다면 어땠을까. 당장 수확이 떨어지고 세금이 줄고 군대가 약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결정을 내린 왕은 오래 왕좌에 앉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가 틀어진다. 이것은 단순히 몰랐던 자의 비극이 아니었다. 루가타는 배급을 꼼꼼히 기록했고, 슐기의 서기들은 가축 한 마리도 빠짐없이 적었으며, 쿠심은 15그릇을 제외하고는 완벽한 장부를 남겼다. 그 어떤 판도 틀리지 않았다. 다만 그 어떤 판도 제국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장부는 정직했다. 알아도 바꿀 수 없는 구조가 문제였을 뿐이다.


나부-아타가 그날 아침 완성한 판은 지금 어딘가 박물관 유리 진열장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 점토는 마르면 굳고, 불에 구우면 더 단단해진다. 우루크가 사라지고 문명이 흙으로 돌아간 뒤에도 그가 새긴 숫자는 남았다. 그는 그것이 5,000년을 살아남으리라는 것을 알지 못했고, 그저 오늘 아침 배급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것만 알았다. 보리의 양, 받는 사람의 이름, 날짜. 제국은 사라졌지만 영수증은 남았고,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읽느냐가 다음 문명의 운명을 결정했다. 나일강 기슭에서는 이미 다른 질문이 시작되고 있었다. 홍수를 측정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사람이, 강가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주석

1) 상부 메소포타미아 초기 청동기시대 농업생산 연구는 강우량 변동과 도시 정착 시스템의 관계를 분석하나, 수메르 남부의 기원전 2400년 및 2100년 수확량 수치를 직접 제시하지 않아 2,537리터라는 구체적 수치를 뒷받침하지 못한다. (출처: Agricultural production and stability of settlement systems in Upper Mesopotamia during the Early Bronze Age,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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