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회계 3화 — 아시리아의 청구서

매달 25일, 당신의 통장에서 돈이 빠져나간다. 세금, 건강보험, 국민연금. 고용주가 이미 원천징수한 뒤라 당신은 액수를 확인할 뿐 거부할 수 없다. 국가는 군대를 보내지 않아도 걷어간다. 그것은 법에 의해 정해졌다. 이 시스템은 이미 수천 년 전에 설계되었는데, 처음에는 서명 대신 칼끝이 점토판에 기호를 새겼고, 서류 대신 군대가 먼저 왔으며, 동의가 아니라 복종이 전제였다. 형식은 달랐지만 논리는 하나였다. 힘으로 한 번 굴복시키고, 장부로 영원히 묶어 버린다.

기원전 841년 가을, 다마스쿠스의 상인 아다드-이드리는 성문 앞에서 짐 보따리를 내려놓았다. 올리브유 항아리 열두 개, 말린 무화과 한 자루, 은괴 두 덩이. 아시리아 군대가 온 것은 작년 가을이었는데, 성벽 한 곳을 허물고 창고에 불을 놓은 뒤 왕에게 무릎을 꿇리고 떠났다. 아다드-이드리는 그것으로 끝인 줄 알았다. 전쟁이 끝났으니 레바논 삼나무를 사들이고, 홍해 향신료를 팔고, 아버지 때처럼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관리가 점토판을 꺼내 기호를 새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받은 물건의 목록이 아니었다. 내년에 바쳐야 할 물건의 목록이었다. 올리브유 항아리 열여섯 개, 은괴 세 덩이. 아다드-이드리가 항의하려고 입을 열자 관리가 눈도 마주치지 않고 점토판을 뒤집었다. 뒷면에는 이미 내후년의 목록도 새겨져 있었다. 전쟁은 작년에 끝났다. 그러나 청구는 지금 시작됐다.


아시리아의 정복은 단 한 번으로 충분했다. 도시를 불태우고, 왕을 끌어내고, 조공 명세를 점토판에 새긴 뒤 군대는 떠났다. 그러나 매년 봄, 관리들이 돌아왔다. 살마네세르 3세의 검은 방첨탑에 이스라엘 왕 예후가 엎드려 있는 부조는 지금도 대영박물관에 남아 있는데, 새겨진 공물 목록은 은, 금, 황금 그릇, 황금 쟁반, 황금 양동이, 주석, 왕의 지팡이, 창이었다. 무릎 꿇는 행위가 돌에 새겨지면, 더 이상 두려움은 필요 없었다. 두려움이란 감정은 일회성이고, 장부는 영속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다드-이드리도, 그의 아들도, 그의 손자도 매년 성문 앞에 짐을 내려놓았다. 이것이 회계의 힘이었다.

기원전 883년, 아슈르나시르팔 2세가 즉위하면서 아시리아는 조공을 제국의 연료로 전환하는 법을 완성했다. 지중해 원정에서 돌아온 왕은 시돈의 삼나무, 비블로스의 은, 티레의 아마포로 님루드를 건설했고, 7.5킬로미터의 성벽과 왕궁과 신전과 동물원이 그렇게 올라갔다. 완공 기념 연회에 초청된 인원만 69,574명이었다고 왕의 비문은 기록하는데, 이 숫자는 과장일 수 있지만 과장이 필요할 만큼 거대한 잔치였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조공이 건설을 낳고, 건설이 권위를 낳고, 권위가 다음 조공을 강제했다.

이 순환을 뒷받침한 것은 당대 세계 최고의 행정 시스템이었는데, 속주 총독은 관할 도시의 곡물 재고와 징수된 은의 무게와 강제 노역자 수를 매년 왕실에 보고했다. 왕실 대표자들이 연 1회 각 속주를 순회하며 장부를 직접 대조했으니, 지금으로 치면 기획재정부와 감사원이 합쳐진 기구가 속주마다 하나씩 있었던 셈이다. 700킬로미터 떨어진 서쪽 국경에서 니네베까지 공문이 닷새 만에 도달했고, 오스만 제국이 전신을 도입한 1855년까지 중동에서 이 속도를 넘어선 통신 체계는 없었다.

조공 창고 관리인 나부-나시르는 매일 아침 입고 수량을 점토판에 새겼다. 금, 은, 구리, 말, 아마포. 세금을 성실히 바친 도시에는 왕이 직접 내린 금과 보석과 상징 깃발이 수여됐다. 깃발을 도시 중심에 걸면 인근 도시들이 그것을 보았다. 나부-나시르는 창고 문을 닫으며 내일 아침 새길 목록을 머릿속에서 훑었다. 이 기계에는 정지 버튼이 없었다. 그 버튼이 없다는 사실은, 더 많은 도시가 편입될수록 점점 더 분명해졌다. 도시가 늘면 창고도 커졌지만, 지켜야 할 외곽선도 함께 늘었다.


기원전 745년,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가 즉위하면서 이 기계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했다. 불규칙한 조공 대신 정기 세금으로 전환하고, 봉신국 체제를 속주 체제로 바꾸면서 현지 왕조 대신 아시리아 총독을 직접 파견했다.

레반트의 항구도시 아스글론에서 세금을 걷던 총독 관리 무샬림은 매달 두 종류의 보고서를 니네베로 보냈는데, 하나는 걷힌 것이고 하나는 쓴 것이었다. 처음 몇 해는 첫 번째 보고서가 두 번째보다 두꺼웠다. 그러나 어느 해부터 순서가 바뀌었다. 이전에는 봉신왕이 알아서 걷어 바쳤지만 이제는 아시리아가 직접 걷고 직접 지켰으므로, 반란이 일어나면 진압 비용도 무샬림의 보고서에 쌓였다.

영토가 두 배 늘어나는 동안 관리 비용은 네 배로 불었는데, 이는 지점 하나를 열 때마다 본사 운영비가 두 배씩 늘어나는 구조였다.

어느 달, 무샬림은 걷힌 것과 쓴 것의 합계를 나란히 적어두고 잠시 붓을 멈췄다. 두 숫자의 간격이 지지난달은 세 마디였고, 지난달은 두 마디였고, 이번 달은 한 마디였다. 아스글론의 항구 냄새가 창문으로 들어왔다. 그는 그 아래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점토판을 뒤집었는데, 항목에 없는 것을 더 쓰거나 뺄 권리는 그에게 없기 때문이었다. 닷새 뒤 니네베로 가는 전령이 왔을 때, 무샬림은 보고서를 건네며 그 간격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치는 보고됐다. 그러나 간격이 의미하는 것은 보고하지 않았다.


기원전 705년 봄, 사르곤 2세가 전장에서 전사했다. 왕이 전장에서 죽었다는 것은 신의 저주를 의미했고, 그 해석이 퍼지는 속도는 봉신국들이 고개를 드는 속도와 같았다. 유다와 페니키아와 바빌론이 조공을 끊었다.

니네베의 창고 관리인 벨-아팔-이딘은 그달 들어오기로 한 은 240탈란트가 도착하지 않자 보고서를 작성했고, 그 다음 달도 작성했다. 그러나 처리할 왕이 없었으므로, 그것들을 읽고 책임질 사람이 없었다. 창고 안에는 전달 재고만 남아 달마다 줄어들었는데, 이는 군대를 먹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센나케립이 즉위해 기원전 701년 레반트를 재침공하자, 유다 왕 히즈키야는 금 30탈란트와 은 800탈란트1)를 배상금으로 바쳤다. 그리고 이는 센나케립의 프리즘 비문에 기록되어 있다. 같은 사건을 담은 열왕기하 18장은 은을 300탈란트로 적고 있어 두 사료 사이에 이견이 있지만, 어느 쪽 수치를 따르더라도 이 은의 무게는 다마스쿠스의 올리브유 항아리 수만 개와 같았다. 벨-아팔-이딘은 다시 채워지기 시작하는 선반을 보며 잠시 손을 멈췄지만, 6년간 쌓인 미처리 보고서들은 처리되지 않은 채 구석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원정의 비용과 회수된 배상금을 나란히 놓으면, 두 숫자 사이의 간격이 무샬림이 손가락으로 재던 것과 닮아 있었다. 더 많이 쓰고, 더 조금 남겼다. 이 간격은 다음 원정 이후에도 줄어들 줄 몰랐다. 원정이라는 이름의 이 기계에도 정지 버튼이 없었고, 그것을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기록을 가장 성실하게 남기고 있었다.


기원전 626년 바빌론이 반란을 일으켰다. 아시리아가 진압군을 남쪽으로 보내는 동안 북쪽에서 메디아가 움직였고, 기원전 614년 종교 수도 아수르가 함락됐으며, 2년 뒤 니네베가 불탔다. 마지막 왕 신-샤리-이쉬쿤은 자신의 궁전에 불을 질렀고, 불길이 창고 지붕을 넘어갈 때 창고 안에는 그달 입고되지 않은 조공의 빈 자리가 그대로 있었다. 기원전 609년, 마지막 저항 거점 하란이 함락되면서 3세기에 걸친 제국이 지워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시리아는 그 시대 가장 정밀한 행정 기록을 보유했고, 가장 빠른 통신망을 운용했으며, 수입과 지출을 나란히 올린 두 종류의 보고서를 꼬박꼬박 왕실로 올렸다. 무샬림은 두 숫자의 간격이 달마다 벌어지는 것을 손가락으로 재며 알고 있었고, 벨-아팔-이딘은 창고가 비어가는 것을 매달 기록했다.

그리고 나부-나시르는 멈출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목록을 훑었다. 이들이 몰라서 기록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기록이 행동으로 이어지는 경로가 없었을 뿐이다.

조공과 세금으로 돌아가는 기계는 들어오는 것이 나가는 것보다 많을 때만 작동했고, 그 균형이 깨질 때 선택지는 둘뿐이었다. 더 걷거나, 더 정복하거나. 속주가 늘어날수록 지켜야 할 외곽선도 늘었고, 외곽선이 늘수록 군사 비용도 불었으며, 어느 순간부터 새로운 정복이 그 비용을 충당하지 못했다. 무샬림이 점토판을 뒤집었던 것은 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 말을 적을 항목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항목을 만드는 순간, 기계는 멈추었다.


기원전 612년 가을, 불길이 니네베를 삼킬 때 창고 선반 위의 점토판들은 타지 않았다. 점토는 불 속에서 오히려 단단해지기 때문이었다. 아다드-이드리가 기원전 841년 성문 앞에서 처음 내려놓은 올리브유 항아리 열두 개가 숫자로 바뀌어 새겨진 판, 관리가 그의 항의를 무시하며 뒤집어 보여준 내년의 목록과 내후년의 목록, 그것들이 연기 속에서 오히려 더 단단하게 구워지고 있었다. 아다드-이드리는 그 판을 끝내 반박하지 못했고, 그의 자손들이 항아리를 가져오는 동안 판에 새겨진 논리는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청구는 굴복보다 오래 살았다. 다마스쿠스의 성문은 그 뒤로도 오랫동안 열리고 닫혔으며, 찾아오는 자의 깃발이 바뀌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청구서를 전달하는 방식은 달라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군대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가 복종을 강제할 수 있다는 것을 서쪽의 어떤 도시들이 먼저 눈치채고 있었다.

주석

1) 센나케립 공격에 관한 학술 논문(Sennacherib's Attack on Hezekiah, 1985)은 히즈키야 배상금 수치를 성경 기록과 아시리아 비문 간 100년 넘게 논쟁된 사안으로 다루며, Wikipedia의 히즈키야 항목 역시 열왕기하의 은 300탈란트 수치가 센나케립 프리즘의 800탈란트와 불일치함을 시사한다. (출처: Sennacherib's Attack on Hezekiah (1985); Wikipedia: Hezeki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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