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회계 5화 — 다리우스의 도박

세금 고지서에는 숫자만 있다. 얼마를 내야 하는지는 적혀 있지만, 그 숫자가 어디서 왔는지는 적혀 있지 않다. 기원전 519년 봄, 수사 궁전 동쪽 창고 앞에서 왕실 서기관 아르타바나는 점토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빌론과 아시리아 속주에서 올라온 납부 보고서였고, 은 1,000탈란트라는 숫자는 정확했다. 그는 다음 판을 집었다. 이집트 700탈란트, 소아시아 400탈란트(일부 사료에는 300탈란트로 기재된다), 리디아 500탈란트, 아르메니아 400탈란트, 박트리아 360탈란트. 숫자들이 줄지어 섰고, 아르타바나는 총계를 새기면서 잠시 손을 멈추었다. 무게 때문이 아니었다. 어젯밤 갈아놓은 새 판의 감촉이 뜻밖에 차가웠기 때문이었다. 이른 봄, 수사의 새벽은 아직 겨울의 끝을 붙들고 있었다. 창고 밖에서는 낙타 행렬이 짐을 내리고 있었다. 아르타바나는 마지막 숫자를 새기고 판을 내려놓은 뒤 창고 안을 바라보았다. 은이 쌓여 있었다. 어제보다 많았고, 그제보다 많았으며, 매일 더 많아졌다. 그리고 그는 그것이 왜인지 알고 있었다.


다리우스 1세가 즉위한 첫해, 그는 제국 전역의 장부를 요청했는데 돌아온 것은 혼돈이었다. 속주마다 다른 화폐, 다른 단위, 다른 방식의 조공이었다. 어떤 속주는 은을 보냈고 어떤 속주는 곡물을 보냈으며 어떤 속주는 인력을 제공했다. 비교할 수 없었고 더할 수 없었으며, 제국의 수입이 얼마인지 왕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는 그 장부들을 쓸모없다고 판단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세금 방식을 통일하는 대신, 결과만 통일하기로 했다.

다리우스가 설계한 사트라피 체제의 핵심은 단순했다. 스무 개 속주, 스무 개의 할당액. 각 사트라프는 매년 정해진 양의 은을 왕실에 납부하되, 납부 방식은 묻지 않았고 걷는 방법도 묻지 않았다. 오직 숫자만 맞으면 됐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총액은 연간 14,560탈란트의 은이었는데, 인도 속주는 금 가루 360탈란트로 납부했다. 아라비아는 예외적으로 면세였으며, 이집트 인근의 에티오피아인들은 정규 세금 대신 2년 내지 3년에 한 번 선물을 바쳤는데, 순금·흑단 200블록·에티오피아 소년 다섯 명·큰 상아 스무 개가 그것이었다. 형식보다 총량이 중요했고, 무엇으로 내든 왕실 회계사들이 은으로 환산해 장부에 올렸다. 지금으로 치면 기획재정부가 전국 지자체로부터 세수를 거두되 현금이든 현물이든 중앙에서 환산하는 방식이었다. 그 규모에서 전례 없는 방식으로, 언어도 문화도 종교도 다른 광대한 땅이 하나의 재정 단위로 묶였다.

아시리아는 정복지를 공물로 짜냈지만 그 부를 유통시킬 방법이 없었다. 강제로 거둔 은과 곡물은 니네베의 창고에 쌓였다가 다음 원정에 소진됐고, 정복지 경제는 수탈 이후 무너졌다. 다리우스의 체계는 달랐다. 속주마다 땅의 크기와 인구와 생산력을 조사했고, 농지 면적을 측량했으며, 상업 도시의 거래량을 추산했다. 그 조사 위에 숫자를 올렸고, 속주마다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할당액을 정했다. 지속 가능한 숫자여야 했고, 매년 낼 수 있어야 했다. 세금 제도가 도입된 이후 수년 내에 첫 번째 완납이 이루어졌다. 스무 개 사트라피(속주) 모두에서 할당액이 채워졌고, 단 한 곳도 빠지지 않았다. 아르타바나가 그날 새긴 총계 판의 숫자들은 줄지어 정렬해 있었다. 차갑고 반듯했다. 흐르게 했을 뿐인데 제국 전체가 하나의 숫자로 모였다. 그러나 체계가 작동하려면 사트라프(총독)에게 칼을 허락해야만 했다. 세금을 걷으려면 무장한 행정력이 필요했고, 제국이 넓을수록 그 칼은 더 많아야 했다.


기원전 518년경, 페르세폴리스 공사가 시작됐다. 아르타바나는 그 장부도 맡았다. 발굴된 페르세폴리스 요새화 점토판(Persepolis Fortification Tablets)에는 그가 매일 새기던 것과 같은 방식의 기록이 빼곡하게 남아 있다. 석공의 이름, 출신지, 일당. 운반부가 실어 온 목재의 무게. 포도주 배급분. 숫자들은 줄마다 달랐지만 형식은 한결같았다. 그는 다음 판을 집었다. 임산부 여성 노동자 항목이었다. 아르타바나는 추가 배급 수치를 새기다 잠시 손을 멈추었다. 점토판에 새겨진 숫자에 따르면, 아들을 낳으면 10쿠르, 딸을 낳으면 5쿠르.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성별이 이미 장부 위에 값으로 올라 있었다. 제국은 태어날 아이의 쓸모까지 미리 계산하고 있었다. 그는 그 숫자를 다시 확인했다. 틀리지 않았다. 그는 다음 항목으로 넘어갔다.

석공, 목수, 금세공인, 운반부, 조각가들은 노예가 아니었다. 그들은 은과 식량으로 임금을 받았고, 숙련 장인에게는 일반 노동자의 세 배에 달하는 임금이 책정됐다. 바빌론에서 올라온 목재 운반부, 이집트에서 파견된 석공, 리디아에서 온 금세공인, 인도에서 온 상아 조각가가 같은 장부 위에 나란히 올랐다. 아르타바나는 그 숫자들을 새기면서 알았을 것이다. 장부에 새긴 선 하나가 기둥이 되고, 수치 하나가 벽이 된다는 것을. 제국이 걷은 세금이 제국의 신민에게 돌아가고 있었다.

기원전 522년, 다리우스가 즉위한 바로 그해에 불이 번졌다. 바빌론이 먼저 일어섰고, 그다음 엘람, 메디아, 이집트, 파르티아, 마르기아나, 사타기디아가 잇달아 봉기했으며, 불꽃이 꺼지기 전에 새 불꽃이 솟았다. 다리우스는 말을 달렸다. 진압하고, 또 진압하고, 또 진압했다. 1년 동안 열아홉 번의 전투를 치렀고1), 열아홉 번 모두 이겼다. 그는 그 승리를 이란 서부의 베히스툰 절벽에 새겼는데, 지상에서 100미터 높이에 누구나 볼 수 있되 손댈 수 없도록 새겼다. 사슬에 묶인 반란 지도자 아홉 명의 부조가 절벽에 박혔다. 아르타바나는 수사로 돌아가 다시 새 판을 집었다. 판의 감촉은 그날 아침 것과 같았다. 차가웠다.


절벽의 문자가 채 마르기도 전이었다. 서쪽 속주 하나에서, 왕의 눈이 닿지 않는 창고 안에서, 누군가가 은을 옮기고 있었다. 반란을 일으킨 사트라프들은 처음부터 충분한 은을 갖고 있었는데, 병사를 사고 동맹을 매수하고 수개월치 군량을 비축하고도 남을 만큼이었다. 그 은은 어디서 왔는가. 왕실에 납부하기 전, 속주 안에서 먼저 걷힌 것이었다. 사트라피 체제가 작동하려면 사트라프가 속주 안에서 먼저 세금을 걷어야 했고, 걷는다는 것은 보유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보유한다는 것은 쓸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왕의 눈과 왕의 귀는 장부를 볼 수 있었으나, 장부에 오르지 않은 은은 볼 수 없었다. 속주의 창고 깊숙한 곳에서, 왕실 납부분과 별도로 축적된 은이 반란의 연료가 됐고, 다리우스가 체계를 정교하게 만들수록 그 체계를 이용하는 방법도 정교해졌다. 감시의 눈이 촘촘해질수록, 그 눈을 피하는 손이 더 능숙해졌다.

다리우스가 만든 것은 착취의 기계가 아니었다. 분배의 기계였다. 세금을 걷어 속주 노동자에게 돌려주고, 제국의 길을 닦고, 페르세폴리스를 세우는 기계. 그 기계는 실제로 작동했고, 실제로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 기계가 작동하려면 반드시 충성이 필요했고, 충성은 강제할 수 있었지만 살 수는 없었다. 제국이 조금이라도 흔들릴 때마다 어딘가에서 사트라프가 돌아섰고, 삐걱거릴 때마다 왕들은 더 강한 감찰관을 보냈으며, 더 높은 할당액을 요구했다. 조일수록 사트라프들은 더 깊은 창고를 팠고, 장부를 두 벌 만들었으며, 더 오래 기다렸다.


기원전 330년, 알렉산드로스의 병사들이 페르세폴리스에 횃불을 던졌다. 궁전이 탔다. 다리우스가 그토록 정밀하게 설계한 체계가 쌓아올린 재화, 12만 탈란트에 달하는 금과 은이 마케도니아의 손으로 넘어갔는데, 이는 아르타바나가 매년 새기던 14,560탈란트의 여덟 배가 넘는 숫자였다. 2세기에 걸쳐 쌓인 제국의 전부가 하룻밤 사이에 주인이 바뀌었다. 어떤 왕이 이 결과를 예방할 수 있었는가. 사트라프에게 칼을 주지 않았다면 세금을 걷지 못했을 것이고, 세금을 걷지 못했다면 제국이 서지 않았을 것이다. 체계를 설계한 사람은 그 체계가 품은 모순도 설계한 것이었다. 더 강한 감시는 더 정교한 우회를 불렀고, 더 높은 할당액은 더 깊은 창고를 팠다. 다리우스가 몰랐던 것이 아니었다. 베히스툰 절벽에 승리를 새길 때 그는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 체계의 내부에서 반드시 무언가가 돌아선다는 것을. 그것은 알면서도 바꿀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아르타바나가 새겼던 점토판들은 불 속에서도 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단단하게 구워져 땅속에 남았고, 2,400년 뒤 발굴된 그 판들이 이 이야기를 전한다. 임산부 배급 기록, 바빌론 운반부의 임금, 스무 속주의 총계가 모두 그 안에 있었다. 은은 사라졌지만 장부는 남았다.


기원전 519년 봄, 아르타바나가 차가운 판 위에 총계를 새기던 그 아침을 생각해보면, 그는 아마 이 숫자들이 무엇을 향해 흐르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창고 밖 낙타 행렬 소리가 들렸고, 은이 쌓였고, 숫자는 정확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가 새긴 총계는 제국의 설계도이기도 했고, 제국의 사망 진단서이기도 했다. 그것들은 서로 같은 숫자였다. 다리우스가 200년에 걸쳐 쌓아 올린 그 은이 어느 날 밤 다른 사람의 창고로 넘어갈 것이라는 사실은, 아르타바나의 판 어디에도 새겨지지 않았다.

주석

1) Wikipedia 'Darius the Great' 항목은 다리우스가 즉위 후 제국 전역의 반란을 진압했다고 기술하지만, 봉기 지역의 구체적 목록이나 '열아홉 번' 전투 횟수는 명시하지 않는다. (출처: Wikipedia: Darius the Gre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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