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회계 6화 — 알렉산드로스의 영수증

돈이 생기면 사람은 달라진다. 더 신중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빠르게 쓴다. 지갑이 두툼할수록 지출 이유가 먼저 생기고, 계획은 나중 일이 된다. 200년치 제국의 금고가 하룻밤 사이에 한 사람의 손에 들어온 순간이 있었다. 그 손이 어떻게 움직였는지는, 재무관 한 명이 파피루스에 기록했다.

기원전 330년 봄, 페르세폴리스의 왕실 금고가 열렸을 때 니카노르는 그 순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목격했다. 금은 합산 120,000탈란트1). 그리스 전체가 50년을 쉬지 않고 모아도 닿지 못할 액수의 주인이 하룻밤 사이에 바뀌었다. 사흘째 밤, 횃불 연기가 내려앉은 창고에서 니카노르는 파피루스 묶음을 펼쳐 집계를 이어나갔다. 그는 숫자를 두 번, 세 번 확인했다. 숫자는 바뀌지 않았다. 니카노르는 왕의 재무관이었다. 마케도니아를 떠날 때 그는 60탈란트짜리 장부를 들고 출발했는데, 그 돈이 병사들의 70일치 식량값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왕이 먼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페르시아가 200년 동안 쌓아 올린 재화가 고스란히 마케도니아의 장부로 넘어왔다. 니카노르는 파피루스에 합계를 적었다. 손이 떨렸다. 두려움인지 흥분인지, 그는 끝내 알 수 없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숫자가 칼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스무 살에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철학과 학문을 배웠고, 원정에 나서기 전 재무관을 먼저 임명했다. 그에게 회계는 전쟁의 부속물이 아니었다. 전쟁의 전제였다. 페르세폴리스 금고 앞에서 그는 집계를 기다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신하들이 불안해서 서로 눈치를 봤다고도 한다. 왕의 표정은 읽기 어려웠다. 그러나 침묵의 순간이 길지는 않았다.


피타르코스의 후손은 페르세폴리스 금고 안쪽에서 일했다. 할아버지가 사르디스에서 크로이세이드 금화를 주조하던 기술이 페르시아 재정 체계로 흡수된 뒤, 그 기술은 세대를 건너 이 창고까지 이어졌다. 그는 새 주인의 집계를 도왔고, 마케도니아 병사들이 들고 온 파피루스에 숫자를 옮겨 적는 동안 손가락 끝에서 황금 가루가 떨어졌다. 제국은 바뀌었지만 금을 다루는 손의 언어는 바뀌지 않았다.

알렉산드로스가 창고를 넘겨받으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파괴가 아니라 계승이었다. 다리우스 1세가 설계한 사트라피 체제-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20개 속주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세금을 납부하되 왕실에 도착하면 하나의 숫자로 통합되는 구조-는 그대로 살아남았다. 이집트를 점령했을 때 알렉산드로스는 스스로 파라오를 자처하며 나일강 기슭의 신전 경제를 건드리지 않았고, 바빌론에서는 상인 길드와 협정을 맺어 상업 세수가 끊기지 않게 했다. 겉으로 보면 완벽한 연속이었다. 그러나 다리우스의 체계와 알렉산드로스의 체계 사이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차이가 하나 있었다. 다리우스는 금고에 쌓인 돈을 제국 내부로 다시 돌렸다. 도로를 놓고, 속주 노동자에게 임금을 줬으며, 반란의 씨앗을 은으로 미리 달랬다. 알렉산드로스의 금고는 오직 다음 전쟁을 위해서만 비워졌다. 제도는 같았지만 그것을 작동시키는 논리가 달랐다. 그 차이가 어디로 이어지는지, 니카노르는 아직 알지 못했다.

마케도니아 출발 당시 병력은 보병 30,000명 이상, 기병 5,000명 이상이었고 하루 급료만 수백 탈란트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출발 전에 왕실 재산과 마케도니아 토지를 귀족들에게 넘겨 현금으로 바꿨고, 그라니코스 전투 이후 소아시아 도시들이 항복하면서 첫 번째 숨통이 트였다. 이수스 전투 이후에는 다리우스의 야전 금고가 통째로 넘어왔다. 전쟁이 전쟁 비용을 충당하고, 정복이 다음 정복의 담보가 되는 순환이었다. 페르세폴리스의 120,000탈란트는 그 순환의 가장 큰 판돈이었다. 니카노르는 그 판돈을 파피루스에 기록했다. 숫자 옆에 무언가를 더 쓰고 싶었는지, 그러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다. 경고를 적을 수 있는 재무관은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기원전 326년부터 324년 사이, 인도 원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과정에서 알렉산드로스는 처음으로 속주 감사를 직접 명령했고, 속주 총독 여섯 명을 처형했다. 이유는 전부 같았다. 횡령과 세수 누락. 원정이 끝나면 바빌론을 행정 수도로 삼아 중앙집권적 세무 기구를 세우고, 속주 세수를 하나의 체계로 끌어모으는 계획도 있었다. 그는 나중 일로 미룬 것이 아니었다. 순서를 정한 것이었다. 아라비아 원정을 마치고, 서지중해로 진출하고, 그다음에 제국 내부를 손보겠다는 순서였다. 제국은 왕의 계획표를 기다리지 않았다.


기원전 324년 가을, 헤파이스티온이 에크바타나에서 죽었다. 열병이었다. 알렉산드로스는 원정 첫날 트로이에서 스스로를 아킬레우스에 비겼고, 헤파이스티온을 파트로클로스라고 불렀다. 둘은 10년을 나란히 행군했던 사이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사흘 동안 시신 곁을 떠나지 않았고, 측근들은 왕이 음식을 거부한다고 보고했다. 니카노르는 그 사흘 동안 아무 지시도 받지 못했다. 장부를 펼쳤지만 결재할 사람이 없었다. 창고 밖에서는 병사들이 조용히 서 있었고, 창고 안에서 니카노르는 숫자들 사이에 홀로 앉아 있었다. 손이 파피루스 위에 놓인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처음 합계를 적던 날, 그 손이 떨리던 이유는 숫자가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지금 손이 멈춘 이유는 숫자보다 큰 것이 금고 밖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헤파이스티온의 장례 비용이 확정됐을 때 그 숫자는 10,000탈란트였다. 니카노르가 조심스럽게 금고 잔액을 보고했을 때 알렉산드로스는 그를 물러나게 했다. 그 10,000탈란트는 바빌론 세무 기구의 설계 비용이었고, 속주 감사관 체계를 전국에 심을 종잣돈이었으며, 알렉산드로스가 계획하던 재정 개혁의 시작점이었다. 그것이 헤파이스티온의 장례대 위에서 함께 타올랐다. 니카노르가 창고 안으로 돌아와 파피루스를 말아 넣을 때, 빠져나간 숫자를 장부에 적어야 했다. 어떤 표정으로 그 숫자를 썼는지는 기록에 없다.

페르세폴리스 금고가 열린 직후부터 황금 120,000탈란트가 시장으로 흘러들었다. 소아시아 항구 도시들의 물가가 치솟았고, 지중해 전역의 곡물 가격이 급등했다. 이집트에서는 금화 가치가 떨어지면서 현물 조세 체계가 삐걱거렸다. 다리우스가 200년에 걸쳐 설계한 사트라피 세율은 고정 금액이었는데, 바빌론이 매년 납부하는 은 1,000탈란트는 물가가 올라도 은 1,000탈란트였다. 납세자에게는 뜻밖의 혜택이었지만 중앙 금고 입장에서는 실질 세수가 급격히 쪼그라드는 것이었다. 황금이 순환하면서 속주 경제가 성장했고, 성장한 경제는 더 많은 세수를 낼 수 있는 토대가 될 수도 있었다. 실제로 훗날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집트 곡물 수출을 국가 독점으로 묶었을 때, 그 기반이 된 것은 알렉산드로스 시대에 팽창한 교역망이었다. 가능성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가능성을 붙들 사람이 없었다. 왕이 구조를 고치기 전에 먼저 사라졌다. 당신이 그 시절 바빌론의 상인이었다면, 물가가 치솟고 세율이 흔들리는 그 한복판에서 내년 계약을 어떻게 잡았겠는가.

기원전 323년 6월, 알렉산드로스가 바빌론에서 열병으로 쓰러졌다. 열흘에서 열이틀 남짓을 버텼다. 그가 숨을 거뒀을 때 금고에 남은 것은 원정 시작 당시 60탈란트와 비슷한 액수였다고 전해진다. 시작할 때와 같은 숫자로 돌아왔다. 다른 것은 제국의 크기뿐이었다.

알렉산드로스 이후 제국을 나눠 가진 장군들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그들은 정복을 멈추고 장부를 열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집트의 곡물로 왕국을 설계했고, 셀레우코스는 내륙 무역로에 통행세를 새로 설계했다. 그들이 세운 왕국이 100년, 200년을 버텼다. 알렉산드로스가 13년 만에 무너뜨린 페르시아 제국은 그 장부가 200년을 살아남은 덕분에 죽은 뒤에도 이 왕국들을 먹여 살렸다. 알렉산드로스는 그 구조를 알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시간보다 먼저 친구를 잃었다. 장부를 고칠 10,000탈란트가 연기로 사라진 날, 제국의 수명도 함께 탔다. 알면서도 바꿀 수 없는 구조가 있다. 이것은 그 구조보다 한 발 앞에서 무너진 이야기였다.


기원전 330년의 그 밤, 니카노르가 손을 떨며 합계를 적던 창고는 지금 돌무더기 아래 있다. 페르세폴리스는 불탔고, 마케도니아 병사들이 밤새 운반한 황금은 흩어져 지중해 전역의 시장으로 스며들었다. 그 황금이 어디까지 흘렀는지 니카노르는 알지 못한 채 떠났다. 그가 남긴 파피루스의 집계 숫자들은 결국 사라졌지만, 그 숫자들이 만들어낸 물가 상승은 지중해 서쪽 두 도시의 장부에 흔적을 남겼다. 알렉산드로스의 금이 지중해 서쪽으로 번지는 동안, 동쪽의 황하 유역에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같은 문제를 풀려는 사람이 수레를 몰고 있었다. 칼 대신 죽간을 손에 쥔 채.

주석

1) OpenAlex 2022년 연구에 따르면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세폴리스·수사에서 노획한 재화는 은 환산 약 5,000톤(약 130,000탈란트 상당)으로 추정되며, 120,000탈란트라는 고정 수치와는 편차가 있다. (출처: Origin and fate of the greatest accumulation of silver in ancient history, OpenAlex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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