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회계 7화 — 상앙의 죽간

처음으로 주민등록번호를 받던 날을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태어날 때 이미 부여됐기 때문이다. 그 번호가 생기는 순간 국가는 당신을 파악했고, 파악한 순간 요구할 수 있게 됐다. 세금도, 병역도, 의료도 그 번호 위에 쌓인다. 번호가 없으면 국가 안에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 전산망도, 신분증도, 인쇄기도 없던 시절, 어떤 관리가 처음으로 백성의 얼굴을 장부에 올리기로 결정했다. 그 결정이 세계를 어디로 끌고 갔는지는, 죽간 묶음 하나를 손에 쥔 사람이 알고 있었다.

기원전 361년 무렵 가을, 위(魏)나라 안읍(安邑) 일대의 저잣거리. 상앙은 수레 위에서 성문을 올려다봤다. 건기의 흙먼지가 낮게 깔렸고, 소가 끄는 짐수레가 골목을 막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쇳소리가 먼 대장간에서 끊임없이 들려왔고, 직물 상인의 천 조각이 바람에 퍼덕였다. 그는 이 나라에서 십 년을 기다렸다. 재상 공숙좌가 그를 천거했지만 위 혜왕은 고개를 저었고, 죽이라는 마지막 경고도 웃어넘겼다. 상앙은 짐을 꾸렸다. 서쪽에서 구인 공고가 떴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의 손에는 얇은 죽간 묶음이 쥐어져 있었다. 표면이 닳도록 읽힌 법전의 초고였고, 여백마다 작은 글씨의 주석이 빽빽했다. 수레 위에서 그가 내려다본 저잣거리에는 쇠가 있었고 곡식이 있었고 사람이 있었다. 그 쇠가 얼마인지, 곡식이 어디서 왔는지, 사람이 몇인지를 아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수레가 서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알렉산드로스가 페르시아 금고를 열어 세계를 사들이던 같은 세기, 동쪽의 전국시대 중원에서는 다른 종류의 실험이 진행되고 있었다. 힘으로 땅을 차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이 있었다.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을 숫자로 포착하지 않으면, 아무리 넓은 영토도 유지할 수 없었다. 춘추시대의 세금 체계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다. 주 천자의 이름 아래 제후들이 공물을 바쳤고, 제후들은 귀족들에게 봉토를 나눠주며 군역을 요구했다. 세금이 아니라 의무였고, 기록이 아니라 관습이었다. 얼마를 냈는지 아무도 정확히 몰랐고, 국가도 알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기원전 594년, 노나라 정부는 초세무(初稅畝)를 실시했다. 경작지 무(畝)마다 일정 비율을 세금으로 매기는, 중국 역사에서 기록으로 남은 가장 이른 토지세였다. 훗날 공자는 《춘추》에 이 사건을 기록했고, 그 기록 방식 자체가 비판이었다. 주나라의 이상적 질서인 정전제(井田制) 아래에서 농민은 귀족의 공전(公田)을 함께 경작해 그 수확을 공물로 바쳤고, 국가가 개인 토지에 직접 세율을 매기는 것은 귀족과 농민 사이의 위계를 국가가 건너뛰는 행위였다. 각자의 위치에 맞게 행동하는 것이 예의 본질이었고, 초세무는 그 질서를 정면으로 깼다. 그러나 노나라의 창고는 채워지기 시작했고, 공자의 비판은 죽간 위에만 남았다.

공자보다 한 세기 앞선 제나라에서 재상 관중(管仲)은 다른 방식을 택했다. 소금과 철의 전매를 국가 수입으로 삼았다. 토지가 아니라 상품의 흐름에서 국가 수익을 뽑아내는 방식으로, 지금으로 치면 간접세 또는 국가 독점 수익에 가까운 발상이었다. 관중이 설계한 제나라의 재정은 기원전 7세기에 이미 안정적인 흑자 기조를 갖추었고, 이 토대 위에서 제 환공은 패자(霸者)의 자리에 올랐다. 바닷가에서 증발시킨 소금 한 덩이가 중원의 패권을 떠받치고 있었다.

그러나 상앙은 이 선례가 왜 지속되지 못했는지도 알고 있었다. 수익이 어디로 흘렀는지 제나라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관리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기록했지만 형식은 통일되지 않았다. 전국시대에 이르면 각국은 사실상 별개의 화폐를 쓰며 독자적인 세제를 운영했다. 경제는 팽창하고 있었지만 국가는 그 팽창을 포착할 언어를 갖지 못했다. 숫자는 있었지만 같은 언어로 쓰인 숫자가 아니었다. 기록은 각자의 방언으로 존재했고, 아무도 전체를 읽지 못했다. 안읍 일대의 저잣거리에서 서쪽을 향해 수레를 모는 사람이 손에 쥔 죽간에는, 그 방언들을 하나의 언어로 통일할 설계도가 담겨 있었다.

기원전 356년, 상앙이 진나라에서 반포한 연좌제(連坐制), 곧 십오제(什伍制)는 그 설계도의 첫 페이지였다. 다섯 가구를 하나의 단위로 묶고, 각 단위가 서로를 감시하며 범죄와 세금을 연대 보증하는 제도로, 표면은 치안이었지만 본질은 과세였다. 중국 역사에서 귀족을 우회해 농민 가구를 국가가 직접 파악한 가장 이른 체계적 시도 가운데 하나였다. 그때까지 진나라 농민들은 귀족의 재산으로 분류됐다. 귀족이 세금을 냈고, 농민이 실제로 얼마나 사는지 왕실은 알 수 없었다. 상앙은 이 구조를 뒤집었다. 귀족을 건너뛰고 국가가 농민에게 직접 손을 뻗었고, 다섯 가구의 연대 보증은 마을 전체를 국가의 장부 위에 올려놓는 것과 같았다. 진나라 왕실 창고의 기록이 처음으로 바닥에서부터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귀족들은 공개적으로 반발했고, 새 법에 항의하러 도성으로 몰려온 수천 명을 변방으로 추방하자 도성의 거리가 조용해졌다는 기록이 있다. 상앙 자신은 나중에 반란을 도모하다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그 시신은 진 혜문왕의 명으로 거열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제도는 살아남았다.

기원전 350년 두 번째 개혁에서 상앙은 도량형을 통일했다. 진나라 전역에서 같은 단위로 곡식을 재고, 같은 기준으로 토지를 측량하며, 같은 형식으로 세금을 기입하게 했다. 훗날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즉각 시행한 정책이 만리장성이 아니라 도량형 통일이었던 것은, 이 실험의 결과를 그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호적과 토지 장부가 정비되자 국가는 처음으로 동원 가능한 자원의 총량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 총량을 끝까지 짜내기 시작했다. 진시황 치세의 토목 사업에 동원된 인력은 시황릉과 만리장성에만 각각 수십만 명씩 달했으며, 아방궁·치도를 포함한 전체 사업을 통틀어 수백만 명에 달했던 것으로 추산된다. 상앙의 호적 제도는 제국의 능력을 키웠고, 동시에 그 능력을 끝까지 남용할 수 있는 구조를 완성했다.


기원전 209년 여름, 대택향(大澤鄕)의 빗속. 진승은 진흙투성이 발로 멈춰 섰다. 빗물이 얼굴을 타고 흘렀고, 앞을 가로막은 물길은 어제보다 깊어져 있었다. 옆에 선 오광(吳廣)이 그를 바라봤고,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진승과 함께 기한을 넘긴 사람들은 이미 수백이었고, 그 너머 들판에서 수만이 같은 빗속을 걷고 있었다. 그 수만의 이름은 모두 장부에 올라 있었지만, 그 수만이 동시에 도달하는 한계는 어느 칸에도 기입되어 있지 않았다. 국가가 자신의 크기를 정확히 아는 것과, 그 크기가 백성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것은 전혀 다른 능력이었다.

장부는 동원 가능한 인력과 수확 가능한 곡식을 기록했다. 그 숫자들 뒤에 각자의 이름과 얼굴이 있었지만 국가는 숫자만 읽었다. 기록이 정교해질수록 국가가 요구할 수 있는 범위도 함께 넓어졌고, 국가는 요구할 수 없는 것을 기록하는 법을 몰랐으며, 기록되지 않은 것은 국가 안에 존재하지 않았다. 진승이 빗속에서 기한을 넘겼을 때, 그것은 법을 어긴 한 개인의 문제였다. 적어도 진나라의 장부 위에서는. 진승의 불꽃은 곧 꺼졌다. 그러나 그 불씨는 들불이 됐고, 조고가 황실을 안에서 무너뜨리는 동안 류방과 항우가 그 혼란을 파고들었다. 진나라는 통일로부터 불과 15년 안팎에 무너졌다1). 장부가 틀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너무 정확하게 한쪽만 기록했기 때문이었다.


상앙이 안읍 일대를 떠날 때 손에 쥐었던 죽간은 결국 역사를 바꿨다. 그가 설계한 장부 체계는 진나라를 강하게 만들었고, 강해진 진나라는 천하를 삼켰으며, 그 제국은 장부의 무게를 백성에게 고스란히 전가하다 스스로 부서졌다. 한나라는 이 전례를 안고 출발했다. 진보다 낮은 세율로 농민을 달랬고, 그 재정 여유를 축적해 400년을 버텼으며, 그 안정 위에서 처음으로 서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안읍 일대의 저잣거리에서 상앙이 수레를 몰았던 바로 그 서쪽 방향으로, 훗날 비단과 도자기를 실은 대상(隊商)들이 걷기 시작했다. 그 길 위에도 쇠가 있었고 곡식이 있었고 사람이 있었다. 이번에는 그 곡식이 얼마인지, 사람이 몇인지를 아는 나라가 길의 한쪽 끝에 서 있었다. 저잣거리의 먼지를 일으키며 서쪽으로 사라지던 수레 한 대가, 두 세기가 지나 수천 마리 낙타의 대열이 됐다. 그 대열이 도달한 곳의 이야기가 다음 이야기이다.

주석

1) Wikipedia에 따르면 진나라는 기원전 221년 통일 후 기원전 206년에 멸망해 존속 기간이 정확히 14년으로, 본문의 '15년 안팎'이라는 표현과 1년의 수치 편차가 있다. (출처: Wikipedia: Qi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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