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회계 9화 — 두 제국의 가격

실크로드 끝에는 또 다른 제국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나라가 비단 꾸러미를 서쪽으로 보내는 동안, 지중해 서쪽 끝에서는 두 나라가 같은 바다를 두고 맞붙고 있었다. 군사력도, 영토도, 야심도 비슷한 두 나라였다. 그러나 그 싸움을 치르는 방식은 정반대였다. 한쪽은 바깥에서 군대를 사 왔고, 한쪽은 안에서 짜냈다. 기원전 241년 봄, 시칠리아 서쪽 아에가테스 제도의 해전이 끝난 다음 날 아침. 카르타고 재무 서기관 마고는 그 차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협상단 선박의 갑판 한쪽에 마고는 앉아 있었다. 연기가 동쪽으로 흩어지고, 바닷물 위에 재가 가볍게 떠다녔다. 손 안에 든 양피지를 펼쳤다. 시칠리아 속령에서 거둔 공납 기록, 히스파니아 은광의 연간 산출량 추산, 이번 전투에 투입된 용병 비용 청구서, 그리고 로마 측이 제시한 배상금 협상 초안. 숫자들을 눈으로 훑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카르타고로 돌아가면 원로원에 보고해야 했다. 23년 전쟁이 이 바다에서 끝났고, 이제 청구서가 시작될 터였다. 계산이 맞지 않았다.


카르타고는 기원전 6세기부터 서부 지중해 해상권을 장악한 페니키아인들의 도시국가였다. 히스파니아의 은광, 아프리카의 농지, 사르데냐의 광물을 잇는 무역망 위에 제국을 세웠고, 기원전 348년 로마-카르타고 조약을 보면 카르타고가 아프리카 연안 특정 구역과 사르데냐에서 로마 선박의 무장 항해, 무역, 도시 건설을 원칙적으로 금지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지중해 서부가 사실상 카르타고의 내해였다는 뜻이다. 바다가 장부였고, 카르타고는 그 장부를 독점했다.

그런데 그 독점은 동시에 약점의 설계도이기도 했다. 카르타고의 과두 체제는 대상인 가문들이 원로원을 장악하는 방식이었고, 국가 재정은 무역 통행세와 속령 공납에만 의존했으며, 카르타고 시민들은 체계적인 직접세를 거의 내지 않았다. 지금으로 치면 개인 소득세 없이 무역세와 속령 공납만으로 국고를 채우는 구조였다. 세금을 내지 않는 시민은 전쟁에서 피를 흘릴 이유도 없었고, 카르타고는 군대를 통째로 용병으로 채웠다. 이베리아인, 리비아인, 갈리아인, 누미디아 기병들이 카르타고의 은화를 받고 싸웠다. 이들은 은화가 있으면 싸우고, 은화가 없으면 떠났다. 혹은 칼을 거꾸로 들었다. 무역에서 은화가 나오고, 은화로 군대를 사고, 군대가 무역로를 지키는 이 순환이 작동하는 동안은 완벽해 보였다. 어느 한 고리만 끊어지면 나머지 전체가 흔들리는 구조라는 사실은, 그 고리가 실제로 끊어지기 전까지 장부 어디에도 적히지 않았다.

1차 포에니 전쟁의 패전 배상금 3,200탈란트를 마련하는 동안 용병 급료가 밀렸고, 기원전 241년 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나자마자 임금을 지급받지 못한 이베리아인, 리비아인, 갈리아인 등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약 2만 명의 용병이 반란1)을 일으켰다. 반란군은 240년에 리비아 각지의 봉기와 합류하며 대규모 내전으로 번졌다. 카르타고 도시에서 불과 수십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였다. 반란을 진압하는 데 약 4년이 걸렸고(폴리비오스는 3년 4개월로 기록한다), 그 기간 동안 카르타고는 배상금을 갚으면서 동시에 내전을 치렀다. 사르데냐에서도 같은 이유로 반란이 일어났고, 로마가 개입해 그 섬을 가져갔다. 전쟁이 없어도 제국은 무너질 수 있었다. 장부가 먼저 쓰러지면 군대가 뒤따랐다. 그 사이에도 마고 같은 서기관들은 양피지에 숫자를 더했다가 지우고, 다시 더했다. 다시 써 넣은 숫자가 진짜인지 아닌지는, 그 숫자를 쓰는 손만이 알았다.

로마는 정반대의 장부를 들고 있었다. 기원전 215년 가을, 마르쿠스 발레리우스는 카푸아 인근 농지에서 징집 통보를 받았다. 전해 칸나이 전투에서 한니발이 로마군에게 궤멸적인 타격을 입혀 이탈리아 반도를 사실상 절반 이상 장악한 직후였다. 그는 수확이 끝나지도 않은 밭 한가운데서 집정관의 사자와 마주쳤다. 명부에 이름이 적혔다. 아내에게 씨앗 단지를 맡기고, 두 아들에게 가을 밭을 부탁하고, 막사로 걸어갔다. 발걸음이 무거웠지만 발을 멈추지 않았다. 그것이 로마 시민이 제국에 바치는 세금의 한 층이었다. 또 다른 층은 현금이었다.

로마는 시민에게 직접세 트리부툼을 부과했고, 이 세금은 자산에 비례했으며 전시에는 부과율이 높아졌다. 칸나이 패배 이후 원로원은 민간 자금 대출 계약을 체결했는데, 부유한 시민들이 국가에 자금을 빌려주면 전쟁이 끝난 뒤 전리품과 속령 수입으로 갚는 방식이었다. 채권자인 시민들에게 전쟁 승리는 곧 투자 수익이었고, 반대로 패배하면 채권도 사라지는 구조였다. 이탈리아 반도의 동맹시들도 같은 원리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 도시들은 로마에 직접세 대신 병력을 제공했고 정복의 이익을 함께 나눴다. 한니발이 이탈리아에서 약 15년을 돌아다니는 동안 대부분의 동맹시들이 로마 편에 남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카르타고의 속령들이 공납의 무게에 반감을 키운 것과 달리, 로마의 동맹 도시들은 같은 장부를 들고 있는 공동 투자자였다. 손을 바꾸는 것은 생존의 선택이 아니었다. 파산의 선택이었다. 그러니까 두 제국의 차이는 군사 전략이 아니었다. 누가 이해관계를 장부 안에 묶어두었는가의 차이였다. 전쟁이 끝난 뒤, 이야기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렀다.


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은 알프스를 넘어 로마군을 연속으로 격파했지만 공성 장비가 끊겼고, 카르타고 본국은 스키피오의 아프리카 공격 앞에 그를 불러들였다. 기원전 202년 자마에서 한니발은 패배했다. 기원전 201년, 카르타고는 은 1만 탈란트를 50년에 걸쳐 분할 납부해야 했고 군대를 해체했다. 로마의 허락 없이는 전쟁도 할 수 없는 반속국 상태가 되었다.

온 세계가 카르타고의 시대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카르타고는 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번성했다. 페니키아 상인들의 솜씨는 전쟁 없는 평화 속에서 더 빛을 발했고, 아프리카 농업 기술도 지중해 최고 수준으로 발달했다. 카르타고는 불과 수십 년 만에 배상금 전액을 조기 상환하겠다고 로마에 제안했다. 전쟁에서 진 나라가, 배상금을 갚으면서도, 더 부유해진 것이었다. 로마 원로원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배상금이 사라지면 카르타고를 통제할 명분도 함께 사라지기 때문이었다. 원로원 의원 카토는 매 연설의 끝에 같은 말을 반복했다고 전해진다. 카르타고를 멸망시켜야 한다고. 공식적 이유는 안보였지만, 카르타고가 부유할수록 지중해 무역의 이익 일부가 로마의 손을 벗어났다. 카르타고의 회복 자체가 위협이 되었고, 번성이 증거가 되었으며, 그 증거가 국가 소멸의 근거가 되었다.

기원전 149년 로마는 이행 불가능한 조건을 내걸었다. 도시를 버리고 내륙으로 이주하라는 명령이었는데, 바다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상업 도시에게 그것은 살아 있는 채로 숨을 멈추라는 말과 다르지 않았다. 카르타고가 거부하자 로마는 선전포고를 했고, 3년의 포위 끝에 기원전 146년 카르타고는 함락되었다. 살아남은 5만 명이 노예로 팔렸고, 항구는 메워졌으며, 도시는 땅이 될 때까지 불탔다. 패배가 카르타고를 죽인 것이 아니었다. 번성이 사형 선고가 되었다.


기원전 146년, 카르타고 항구가 불길에 잠기던 날. 마고가 아에가테스 제도의 갑판에서 손에 쥐었던 양피지와 같은 종류의 숫자들이 연기 속으로 사라졌다. 계산이 맞지 않는다고 느꼈던 그 불안이, 끝내 옳은 예감이었음이 증명된 셈이었다. 장부가 재가 되었다고 역사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전쟁 자금을 댄 귀족들은 전리품과 속령의 땅으로 보상받았고, 마르쿠스의 후손들은 전쟁에서 돌아와 황폐해진 농지를 헐값에 대지주에게 넘겨야 했다. 카르타고를 죽인 장부의 논리가 이번에는 로마 내부를 향해 방향을 바꾸었다. 다음에 무너지는 것이 어디인지는, 조폐국 도가니 앞에 선 한 남자가 먼저 알게 될 터였다.

주석

1) 위키피디아 'Mercenary War' 항목은 반란 병력을 '20,000명의 외국 병사'로 명시하고 있어 '약 2만 명'이라는 수치가 실제 사료 기반 수치임을 확인시켜 주지만, 70,000명의 아프리카인이 추가로 합류했다는 사실은 단순히 '용병 반란'으로 기술하는 것이 규모를 과소평가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출처: Wikipedia: Mercenary W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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