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회계 10화 — 데나리우스의 마지막 밤

과자 봉지 뒷면에는 내용량이 적혀 있다. 그러나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작년에 몇 그램이었는지, 재작년에는 몇 그램이었는지. 제조사는 조금씩 줄인다. 5퍼센트, 다시 3퍼센트, 또 4퍼센트. 봉지 크기는 그대로고, 포장 디자인도 그대로며, 가격도 그대로다. 달라진 것은 안에 든 것뿐이다. 이것이 슈링크플레이션이다. 탄로나는 것은 한 번에 10퍼센트가 줄었을 때가 아니라, 누군가 오랜만에 옛날 봉지를 꺼내 나란히 놓았을 때다.

서기 268년 가을, 루키우스 칼비우스는 로마 조폐국 앞마당에 서 있었다. 갓 찍어낸 데나리우스 하나를 손가락으로 집어 들고 빛에 비췄다. 황제 갈리에누스의 옆얼굴이 선명했다. 그는 동전을 저울에 올렸다. 바늘이 흔들리다 가리킨 눈금은 3.8그램이었고, 규정은 4그램이었다. 오차 범위라고 우길 수 있었다. 그러나 이달만 세 번째였다. 칼비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동전 표면을 손톱으로 긁었다. 은빛 가루가 묻어나고 그 아래로 구리가 드러났다. 겉에만 은을 입힌 것이었다. 창고 밖에서 병사들이 오늘치 급여를 받으러 줄을 서 있었다. 이 동전들이 그들의 한 달 봉급이 됐다. 칼비우스는 합격 표시를 새기고 다음 것을 집어 들었다. 제국이 멈추지 않는 한, 그의 손도 멈추지 않을 것이었다.


데나리우스는 기원전 211년에 도입됐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의 한복판이었다. 한니발이 이탈리아반도를 유린하던 시절, 로마는 전비 조달을 위해 화폐 체계를 전면 개편했고, 거의 순은에 가까운 은 함량(약 96~98퍼센트), 무게 4.5그램의 새 은화가 로마 경제의 표준이 됐다. 병사 하루 봉급 한 닢. 농부가 보리 한 자루를 팔고 받는 돈. 로마 군단이 라인강을 건너고 유프라테스강까지 밀고 들어가는 동안 데나리우스도 함께 이동했고, 브리타니아의 항구에서도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시장에서도 상인들은 이 동전을 받았다. 화폐가 군단보다 먼저 도착하는 경우도 있었다. 리디아가 화폐라는 언어를 발명하고 페르시아가 그것을 계승했다면, 로마는 그 언어를 지중해 전체의 공용어로 만들었다. 로마의 실질적 국경은 성벽이 아니라 이 동전이 통용되는 범위였다.

칼비우스의 아버지도 조폐국에서 일했다. 아버지가 검사하던 동전은 아직 은이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시절 이야기다. 칼비우스는 가끔 아버지가 남긴 동전 하나를 꺼내 들었다. 묵직했다. 소리도 맑았다. 저울에 올리면 바늘이 흔들림 없이 멈췄다. 서기 64년 로마 대화재 이후 네로가 처음 은 함량을 줄였다. 재건 비용이 급했기 때문이다. 전통적 분석에 따르면 이때의 순도는 약 93퍼센트로1), 5퍼센트가량 낮아진 수치였다. 표면만 봐서는 아무도 몰랐다. 이후 황제들이 계속 조금씩 은 함량을 낮췄고, 칼비우스의 아버지가 조폐국에 들어온 날 은 함량은 이미 절반 수준이었으며, 지금 갈리에누스 황제 치하에서 5퍼센트 수준에 불과했다2). 사실상의 은도금화다. 아버지가 쥐던 동전과 아들이 쥔 동전 사이에 은의 대부분이 사라진 것이다. 공고는 없었다. 선언도 없었다. 아버지의 동전과 아들의 동전은 같은 이름을 달고 있었다. 한니발을 막아낸 그 전쟁이 데나리우스를 낳았다. 그리고 그 데나리우스가 로마를 먹여 살리는 동안, 로마는 조금씩 그것을 갉아먹고 있었다.

시장은 재빨리 알아챘다. 은 함량이 높은 구형 동전이 유통에서 사라졌다. 상인들은 좋은 돈을 숨기고 나쁜 돈만 시장에 내놓았다. 이집트에서 밀 한 아르타바가 1세기에 드라크마 여섯 닢이었는데3), 3세기 후반에는 200닢을 요구했다는 기록이 파피루스에 남아 있다. 황제들은 명목 급여를 올렸다. 더 많은 동전이 필요했고, 더 많은 동전을 찍으려면 은이 더 줄어야 했다. 칼비우스의 도가니가 쉬지 않는 이유였다. 그가 합격 표시를 새길 때마다 그 동전 하나가 악순환을 한 바퀴 더 돌렸다. 병사들의 봉급을 줄이면 국경이 열리고, 은 함량을 지키면 동전이 모자라며, 동전을 더 찍으면 시장이 얼어붙었다. 칼비우스의 손이 멈출 수 있는 자리는 처음부터 없었다.

서기 235년부터 284년까지 50년 동안 황제가 스물여섯 명 바뀌었다. 군인 황제 시대였다. 황제 자리는 군대의 지지로 유지됐고, 군대의 지지는 즉위 선물과 꾸준한 봉급으로 샀으며, 황제가 교체될 때마다 새 황제는 병사들에게 특별 지급을 약속했다. 재원은 언제나 조폐국이었다. 갈리에누스가 황제로 있는 15년 동안,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이래 반세기에 걸쳐 침식된 은 함량이 마침내 바닥에 닿았다. 그는 세 방면의 내전을 동시에 치르면서 라인강, 다뉴브강, 페르시아 국경 방면 군대에 급여를 지급해야 했다. 어느 방향도 포기하면 황제 자리가 위태로웠다.

268년 갈리에누스가 암살된 뒤, 두 황제를 거쳐 270년에 즉위한 아우렐리아누스는 274년 화폐 개혁을 시도했다. 당시 사실상의 표준 유통화였던 은도금화(안토니니아누스)에 최소 5퍼센트 은 함량을 보증하는 표시를 새겼다. 이것이 보증이라는 사실 자체가, 그 이전 동전들이 보증 없이 유통됐다는 고백이었다. 칼비우스는 새 표시가 찍힌 동전을 손에 들어봤다. 무게도, 소리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황제의 도장이 찍혔다. 그것으로 충분한지는 시장이 결정할 것이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재임 5년 만에 암살됐다. 서기 301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최후의 수단을 꺼냈다. 밀, 보리, 기름, 포도주, 빵, 이발 요금, 교사 월급, 마차 운임까지 수백 가지 품목의 상한 가격을 황제가 직접 법으로 정했고, 위반자는 사형이었다. 칙령문이 제국 각지의 돌벽에 새겨졌다. 결과는 빠르게 나타났다. 정해진 가격으로는 팔수록 손해였으므로 상인들이 물건을 거뒀다. 황제의 인장도 시장의 논리를 이길 수 없었다. 황제들은 화폐를 희석할 때마다 단기 문제를 해결했지만, 그 대가로 장기 신용을 팔았다. 도가니의 불이 꺼지지 않는 한, 그 거래는 계속됐다.


서기 476년,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게 폐위됐다. 칼의 승리처럼 보인다. 그러나 오도아케르가 황제를 쫓아낼 수 있었던 직접적 이유는 그의 병사들—로마와 동맹 계약을 맺은 게르만 부족 전사들, 포에데라티—이 오랫동안 약속된 이탈리아 내 토지 분배를 거부당했기 때문이었다. 그 거부의 배경을 거슬러 올라가면, 세수가 바닥났는데, 그것은 경제 활동이 극도로 수축했기 때문이었으며, 경제가 수축한 것은 화폐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이 연쇄의 출발점을 찾으려면 서기 476년에서 412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서기 64년, 네로가 데나리우스 은 함량을 처음 줄이기로 결정한 그 순간으로.

그 결정을 내린 네로는 제국이 무너지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해 재건 비용이 급했을 뿐이었다. 어느 황제도 은 함량 1퍼센트를 낮추는 결정이 제국을 죽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조폐국 도가니에서 은 대신 구리를 더 넣기로 결정한 것은 황제였지만, 그 결정을 하나씩 실행에 옮긴 것은 칼비우스 같은 사람들이었고, 그 동전을 아무 말 없이 받아쥔 것은 병사들이었으며, 탁한 소리를 들으면서도 빵과 바꿔준 것은 상인들이었다. 제국 전체가 공모했다. 누구도 강요받지 않았고, 누구도 선택하지 않은 것처럼 행동했다. 무너지는 신뢰를 떠받치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하루씩 버텼다. 그 하루들이 쌓여 412년이 됐다. 로마는 단 한 번도 결정적으로 패하지 않았다. 그냥 천천히, 멈추지 않고 비었다.


칼비우스는 퇴근길에 빵집에 들러 동전 두 닢을 꺼냈고, 주인이 받아 손가락으로 두드려봤다. 탁했다. 주인이 눈썹을 올렸고, 칼비우스는 눈을 피했다. 그래도 주인은 빵을 건넸다. 아직은 받아줬지만, 내일은 어찌될지 몰랐다. 칼비우스는 빵을 들고 저물어가는 티베르강 옆길을 걸었다. 강 건너 저쪽에서 불빛이 보였다. 게르만족의 야영지라는 소문이 있었다. 그들도 이 동전을 받아본 적이 있을 것이었다. 탁한 소리가 나는 것도 알고 있을 것이었다. 그들은 신뢰가 먼저 사라진 자리로 걸어 들어올 것이었다. 막아설 군대는 이 동전을 받고 서 있는 병사들이었다. 오늘 빵이 어제보다 작다는 것을, 칼비우스는 알았다. 그러나 그 빵 한 조각의 크기가 제국의 남은 시간을 재고 있다는 것은 몰랐다. 로마가 끝난 자리, 동쪽에 남은 절반은 같은 문제 앞에서 다른 선택을 했다. 그 선택이 천 년을 더 버텼는지, 아니면 단지 천 년을 더 미룬 것이었는지는, 저울 하나의 무게에 달려 있었다.

주석

1) 서기 3세기 은-구리 합금 주화 분석 연구에서 데나리우스와 안토니니아누스의 평균 합금 비율이 약 8% 차이를 보임이 확인되었으나, 네로 시대 93퍼센트 수치 및 5퍼센트 감소폭의 직접적 근거는 제시되지 않는다. (출처: A Multi-Analytical Approach on Silver-Copper Coins of the Roman Empire to Elucidate the Economy of the 3rd Century A.D., 2022)

2) 서기 3세기 데나리우스·안토니니아누스 160점 분석 결과, 두 화폐 종류 간 은 함량 평균 차이가 약 8%로 측정되어 특정 황제 치하의 정확한 수치에 이견이 존재한다. (출처: A Multi-Analytical Approach on Silver-Copper Coins of the Roman Empire to Elucidate the Economy of the 3rd Century A.D., 2022)

3) 이집트 밀 가격과 임금 계약을 분석한 연구는 서기 235~305년 사이 인플레이션과 통화 평가절하를 다루지만, 1세기 여섯 드라크마라는 기준가 및 3세기 후반 200닢이라는 수치의 구체적 배율에 대해 직접적인 수치 검증 자료를 제공하지 않는다. (출처: The Crisis of the 3rd Century A.D.: Wage Increases and Inflation in Roman Egypt,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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