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회계 11화 — 비잔티움의 금화

저울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은 때때로 문제가 된다. 콘스탄티노플 항구 근처, 환전상 디미트리오스는 아침마다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금화 세 닢을 저울에 올리는 것이었다. 이집트에서 온 금화, 페르시아에서 건너온 금화, 제국 조폐소가 찍어낸 금화. 세 닢의 무게가 약 4.5그램으로 일치하면 그는 아무 말 없이 주판을 들었다. 달랐을 때는 달랐다. 그 차이를 장부에 옮기는 것이 그의 하루 첫 번째 일이었고, 그 숫자가 하루의 이익과 손실을 결정했다. 디미트리오스는 이름 없는 환전상이었다. 그러나 그의 저울이 재고 있던 것은 금화의 무게만이 아니었다. 비잔틴 제국은 천 년을 넘게 버텼다. 많은 사람들이 그 이유를 삼중 성벽과 그리스 불과 복잡한 궁정 외교에서 찾는다. 그 진짜 이유는 디미트리오스가 매일 아침 저울을 꺼내는 자리에 있었다.


솔리두스의 출발점은 신뢰의 위기였다. 로마 제국이 분열되기 직전, 3세기 내내 황제들은 재정 위기를 넘기려고 금화 아우레우스의 금 함량을 조금씩 줄였다. 상인들은 그 변화를 가격에 반영했고, 물가가 오르면서 화폐 신뢰는 무너졌다. 콘스탄티누스 1세가 312년에 새 금화를 주조1)한 것은 이 구조를 끊으려는 시도였다. 그는 무게를 72분의 1리브라, 즉 약 4.5그램으로 고정하고 금 순도를 약 95.8퍼센트로 유지하도록 명령했다. 솔리두스는 그렇게 태어났다. 로마 서쪽이 무너지고 게르만 왕국들이 서유럽을 나눠 가진 뒤에도, 비잔틴 제국은 솔리두스의 무게를 바꾸지 않았다. 7세기 이슬람 칼리프국이 금화를 만들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솔리두스의 무게를 기준으로 삼았다. 동방 교역로에서 이 금화는 '비잔티온'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고, 서유럽 상인들은 '베잔트(bezant)'라 불렀다. 지중해에서 인도양까지, 단일한 가치 척도가 200년, 300년 동안 흔들리지 않았다. 유스티니아누스 치세인 527년에서 565년 사이, 국고에는 매년 수백만 솔리두스가 들어왔다. 나일강 삼각주의 세금, 소아시아의 관세, 흑해 연안의 교역세가 금화 형태로 콘스탄티노플로 모였다. 그 신뢰는 어디에서 오는가. 금화 자체의 품질인가, 아니면 그 금화를 보증하는 제국의 힘인가. 디미트리오스가 매일 저울을 꺼낸 것은, 그 답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신뢰의 진짜 구조는 조폐소 밖에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7세기, 칼리프국의 팽창으로 이집트와 시리아가 비잔틴의 손에서 빠져나갔다. 세수는 반토막이 났다. 유스티니아누스가 쌓은 제국의 윤곽이 지도에서 지워지기 시작했다. 상황은 치명적으로 보였다. 제국이 선택한 답은 장부였다. 테마 제도는 군사 행정 구역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광역자치단체와 사단을 합친 형태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강력한 총독적 전권을 지닌 구조였다. 스트라테고스라 불리는 장관이 군사권과 민정권을 동시에 쥐었고, 황제가 직접 임명했다. 그러나 핵심은 따로 있었다. 각 테마는 토지 대장을 작성하고 토지 면적과 생산력에 따라 세금을 부과했다. 과세 단위는 '스티콘'이라 불렸고, 스티콘당 납부 솔리두스 수가 정확히 기록되었다. 아나톨리아 고원 어느 마을의 보리밭 하나에도 이름이 붙여졌다. 로마는 도시 단위로 세금을 걷고 납부 방식을 지역이 결정하게 했다. 테마 제도는 그 아래, 보리밭 한 뙈기까지 내려갔다. 7세기의 비잔틴이 영토를 잃고도 무너지지 않은 것은 잃어버린 땅 대신 남은 땅의 숫자를 더 정밀하게 쥐었기 때문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의 재정관들은 소아시아 어느 마을의 밀밭이 몇 스티콘이고 작년에 얼마를 냈는지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부가 더 촘촘해질수록, 장부 바깥에서 자라는 것들이 있었다.

9세기 마케도니아 왕조가 들어서면서 비잔틴은 다시 팽창하기 시작했다. 불가리아, 시리아, 크레타가 차례로 돌아왔다. 황제 니케포로스 2세는 아랍 세력을 밀어내며 시리아 북부의 비옥한 지대를 되찾았고, 그 땅의 세수는 콘스탄티노플의 창고를 채웠다. 바실리오스 2세는 재위 약 49년 동안 국고에 1,440만 노미스마타, 약 90톤의 금을 쌓아두었다. 그러나 뒤를 이은 황제들은 군 지휘관들에게 공을 치하하는 방식으로 '프로노이아'를 지급했다. 국유지 수익을 임시로 개인에게 위임하는 제도였는데, 처음에는 생전에 한해였다가 나중에는 자식에게까지 세습이 가능해졌다. 테마 제도의 토지 장부가 중앙 재정관의 책상에 있었다면, 프로노이아 귀족들의 장부는 그 귀족의 영지 안에 있었다. 바실리오스 2세가 죽은 뒤 그가 쌓아둔 금은 20여 년 안에 거의 사라졌다. 군사 원정 때문이 아니었다. 궁정 소비와 귀족 가문에 대한 양보로 흘러나갔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황제 로마노스 4세가 셀주크 투르크에게 포로로 잡혔을 때, 사람들은 그것을 제국 쇠락의 결정적 순간으로 기억했다. 그러나 더 치명적인 일은 30년 전에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만지케르트가 아니라 조폐소에서. 1040~1050년대(콘스탄티노스 9세 재위 1042~1055년)의 솔리두스는 금 순도가 약 87.5퍼센트로 내려갔다. 1060년대에는 약 75퍼센트였다. 1068~1071년(로마노스 4세 치세)에 이르면 약 66.7퍼센트 수준이었다. 무게는 약 4.5그램 그대로였다. 겉보기에는 같은 금화였다. 상인들은 산(酸)으로 금화를 긁어 성분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긁힌 자국이 남은 솔리두스가 지중해 항구들을 돌았다. 물건의 가격이 오르기 시작했다. 국경 너머 상인들은 솔리두스를 받기 전에 망설이기 시작했다. 700년을 흔들리지 않던 신뢰가 무너지고, 긁힌 자국만이 남았다.

바실리오스 2세가 쌓아둔 금이 소진되자 군사 원정 비용을 충당할 길이 막혔다. 화폐를 더 찍으려면 금이 있어야 했고, 금이 부족하면 함량을 줄이는 수밖에 없었다.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는 1092년 화폐 개혁을 단행해 새 금화 히페르피론을 도입하며 신뢰를 되찾으려 했다. 일부는 성공했다. 그러나 이미 달라진 것이 있었다. 700년간 중앙에서 관리하던 품질 보증이 한번 깨지자, 콘스탄티노플이 제국 전체의 금화를 통제한다는 믿음 자체가 흔들렸다. 금 함량을 줄이지 않으면 군대가 없었고, 군대가 없으면 제국이 먼저 무너졌다. 금 함량을 줄이면 화폐 신뢰가 무너지고, 화폐 신뢰가 무너지면 제국이 천천히 무너졌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결과는 같았다. 결과를 바꿀 방법은 없었다.


디미트리오스가 아침마다 저울에 올린 세 닢의 금화 중, 어느 날부터 제국 조폐소가 찍어낸 금화가 가장 먼저 흔들렸다. 페르시아 금화가 아니었다. 이집트 상인의 금화가 아니었다. 그는 그 차이를 장부에 적었을 것이다. 그 숫자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장부에 적는 것뿐이었다. 조폐소의 문을 두드릴 수도, 황제에게 청원을 올릴 수도 없었다. 환전상의 저울은 진실을 쟀지만, 진실을 멈추는 자리는 그의 저울대 위에 없었다. 솔리두스를 갉아먹은 것은 성벽 밖의 검이 아니라 심장부의 조폐소였다. 제국이 스스로 자신의 금화를 의심하게 만들었을 때, 지중해의 상인들은 이미 다른 계산을 시작하고 있었다. 그 무렵, 지중해 동쪽에서는 금화가 아니라 상인의 신용 문서로 세계를 묶으려는 제국이 있었다. 바그다드의 장부가 솔리두스 없이도 교역을 움직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주석

1) OpenAlex 자료는 솔리두스 기준 무게를 4.5g 순금으로 적시하고 있으나, Wikipedia는 실제 무게를 약 4.45g으로 기록해 본문의 4.5g 수치와 미세한 편차가 존재한다. (출처: Wikipedia: Solidus)

함께 읽으면 좋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