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회계 12화 — 알라의 장부

국가가 망한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아는 사람은 누구일까. 대통령이나 장관이 아니다. 예산실 말단 서기다. 숫자가 줄기 시작할 때, 그 숫자를 직접 검산하는 사람만이 먼저 안다. 786년 가을 밤, 바그다드 총리부 청사의 서기관 유수프는 그 사람이었다. 등잔 세 개를 모두 켜야만 양피지의 숫자가 보였다. 이라크 사와드 평원의 하라즈 세수 집계. 손가락으로 열을 짚어 끝 숫자에 닿았다. 1억 200만 디르함. 세 번 확인했다. 틀리지 않았다. 붓을 내려놓고 손가락의 잉크 얼룩을 바라보다가 눈을 들었다.

티그리스강 건너편, 칼리프 하룬 알-라시드의 새 궁전에서 불빛이 강물 위로 일렁였다. 바그다드는 세상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인구 50만을 넘기며 장안을 능가했고, 낙타 대상과 향신료 상인들이 거리를 메웠으며, 학자들이 그리스어·페르시아어·산스크리트어 문헌을 아랍어로 번역하고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국립도서관과 연구원을 합친 '지혜의 집'이 하룬 치세 아래 성장하고 있었다.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복도 저쪽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새 칼리프의 즉위를 알리는 전령이었다. 유수프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새 칼리프가 누가 되든, 이 황금기는 황금으로 서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가 지금 막 세 번 확인한 숫자로 서 있었다. 그 숫자를 받쳐온 기둥이 몇 개인지는, 유수프도 완전히 알지 못했다.


아바스 왕조가 750년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리고 권좌에 올랐을 때, 새 왕조가 물려받은 것은 광대한 영토만이 아니었다. 균열이 시작된 세금 체계도 함께 물려받았다. 우마이야 시대의 조세 구조는 단순하면서도 취약했다. 비무슬림 납세자가 두 가지 세금을 부담했다. 하나는 지즈야, 즉 비무슬림 성인 남성에게 부과하는 인두세로 가난한 자는 1디나르, 중산층은 2디나르, 부유층은 4디나르1)를 냈다. 다른 하나는 하라즈, 농경지에 매기는 토지세였다. 이 두 세금이 칼리프국 수입의 근간이었다.

문제는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사람이 늘수록 세금 기반이 서서히 허물어진다는 데 있었다. 개종자는 지즈야를 면제받았고, 우마이야 시대의 지방 총독들은 이를 막기 위해 개종한 사람에게도 계속 세금을 물렸다. 그 부당함이 켜켜이 쌓여 아바스 혁명의 불씨 가운데 하나가 됐다. 코호라산 지방에서는 세금 불평등에 분노한 마왈리, 즉 개종 무슬림들이 혁명군의 주축을 이루었다. 아바스 왕조는 이 불평등을 혁명의 명분으로 내세웠고, 그 명분 위에서 황금기를 열었다.

하룬의 수석 법관(카디 알-쿠다트) 아부 유수프는 하룬 치세 중반 무렵 칼리프의 요청으로 조세 원리를 담은 책 『키타브 알-하라즈』를 집필했다. 지금으로 치면 대법원장이 세법 총람을 직접 편찬한 셈이었다. 그는 고정 세율 대신 수확량에 비례하는 세금을 권고했다. 농민이 더 많이 생산하면 더 많이 내는 방식이 장기적으로 농업 투자를 장려해 세수도 늘어난다는 논리였다. 지방 총독들이 농민을 착취해 단기 수익을 올리는 관행도 직접 비판했다. 제국은 그 책을 성전처럼 보관했다. 따르지 않은 채로.

아바스 칼리프국의 세금 엔진은 사와드 평원 위에서 돌아갔다. 이라크 남부,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이 만들어내는 충적 평야였다. 수천 년 전 수메르인들이 최초의 관개 수로를 팠던 바로 그 땅이 이제 제국의 심장 노릇을 했다. 9월이면 수로 곳곳에서 물레방아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고, 가을 수확이 끝나면 세리들이 마을을 돌며 곡물 더미와 은화를 걷었다. 하룬 치세에 이 평원 하나에서 나오는 하라즈 세수가 1억 200만 디르함을 넘어섰는데, 이는 칼리프국 전체 세수의 30퍼센트 이상으로 단일 지역 중 최대 비중이었다. 달리 말하면 제국 전체의 운명이 이 평야의 수로 하나에 묶여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땅에는 다후칸이라 불리는 구(舊) 페르시아 지주 귀족들이 있었다. 아랍 정복 이전부터 수로를 관리하고 소작인을 감독하며 세금 징수 중간상 역할을 해온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없으면 수로는 막히고, 수로가 막히면 세금은 나오지 않았다. 아바스 왕조는 이들을 그대로 활용했고, 재상직을 장악한 바르마크 가문도 페르시아 계통이었다. 칼리프는 아랍어로 기도를 드렸지만, 국고를 채운 것은 페르시아 방식의 행정이었다. 이 두 기둥, 사와드의 토지세와 다후칸의 수로 위에 세 번째가 세워져 있었다. 그 세 번째가 흔들릴 때 나머지 둘도 얼마나 버틸 수 있는지는, 아직 아무도 시험해보지 않은 문제였다.

시리아 출신 상인 이브라힘은 793년, 코호라산에서 바그다드로 향하는 낙타 대상의 마지막 날을 걷고 있었다. 비단 두루마리 서른 개를 싣고 열두 살에 처음 이 길을 걸었다. 이제 마흔셋이었다. 낙타가 일으키는 먼지 속에서 눈을 가늘게 뜨면 바그다드의 원형 성벽이 지평선 위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바그다드 외곽 검문소에서 세관원이 화물 목록을 요구했고, 이브라힘은 비단 서른 두루마리와 중국산 도자기 여섯 점을 신고한 뒤 관세를 냈다. 영수증을 받아 품에 넣었다.

동쪽에서 중국 비단과 도자기가 오고, 서쪽에서 지중해의 향신료와 직물이 오며, 바그다드는 그 교차로였다. 무역 관세 수입만으로도 칼리프국 금고에 매년 수천만 디르함이 흘러들었고, 사마르칸트에서 발행된 어음이 바그다드 시장에서 현금처럼 통하는 시절이었다. 이브라힘이 품에 넣은 영수증 한 장이 그 교차로의 무게를 담고 있었다. 지즈야도, 하라즈도, 다후칸의 수로도 사라지지 않았다. 다만 그 위에 올려진 무게가,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기울고 있었다.


하룬 알-라시드가 809년 죽었을 때, 장부에는 아직 금이 넘쳤다. 그러나 그의 두 아들 알-아민과 알-마문이 칼을 뽑았다. 811년 내전이 시작됐다. 813년 알-아민이 패사하며 핵심 교전이 마무리됐지만, 알-마문이 바그다드에 입성한 819년까지 혼란은 이어졌고 그 사이 바그다드 일대 농경지가 약탈군의 발굽에 짓밟혔다. 수로가 끊기고 밭이 황폐해지며 사와드의 세수가 곤두박질쳤다.

칼리프들은 무너지는 세수를 메우기 위해 이크타 제도를 꺼냈다. 세금 징수권을 군사 지휘관들에게 넘기는 방식으로, 지휘관은 배정된 땅에서 세금을 직접 걷어 군대 유지비로 썼고 나라에 돌아오는 몫은 없었다. 징수권을 최고 입찰자에게 경매로 파는 방식도 병행됐다. 낙찰자는 투자를 회수하기 위해 농민을 쥐어짰고, 농민은 땅을 버리고 달아났다. 버려진 땅에서는 세금이 나오지 않았고, 칼리프는 더 많은 이크타를 뿌렸다. 수로 보수에 돈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부 유수프의 책은 여전히 도서관에 꽂혀 있었다.

그리고 누구도 큰 소리로 말하지 않는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750년 혁명 당시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무슬림은 전체 인구의 10퍼센트 안팎에 불과했다. 그러나 개종이 가속화되면서 9세기 말~10세기 초에는 이라크에서 무슬림이 다수를 이루기 시작했고, 지즈야를 낼 비무슬림의 수는 혁명 직후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다. 개종은 자유로웠고 강요는 없었으며, 신앙이 퍼져나가는 동안 세수 기반이 함께 잠식됐다. 이크타의 확산이 농경지를 망가뜨리는 동안, 개종의 확산은 조세 인구를 녹였다. 두 손이 같은 방향으로 당기고 있었다.

누군가는 아바스 왕조가 자신이 세운 원칙에 배신당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배신은 외부에서 오지 않았다. 혁명의 정당성을 지탱한 바로 그 논리 안에 붕괴의 씨앗이 있었다. 개종자에게 세금을 물리지 않겠다는 약속, 그 약속이 지켜질수록 국고로 들어오는 돈이 줄어드는 구조. 유수프가 그날 밤 세 번 검산한 숫자는 그 약속 위에 서 있었다.


아바스 왕조가 차별 과세의 부당함에 분노한 혁명으로 세워진 나라라는 사실은 역사책에 나온다. 그런데 그 분노가 옳았다는 사실, 그리고 그 부당함이 제국 세수의 근간이었다는 사실은 같은 페이지에 적히지 않는다. 이 두 사실을 동시에 읽어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

정의가 실현될수록 황금기를 받쳐온 기둥이 무너졌다. 이것은 위선의 문제가 아니었다. 개종을 막을 수 없었고 막아서도 안 됐다. 이크타를 거두어들이려 해도 이미 군대가 이크타에 의존하고 있었다. 농민을 보호하려면 세금을 줄여야 했고, 세금을 줄이면 이크타를 더 뿌려야 했다. 어느 칼리프도 악의로 이 구조를 설계하지 않았다. 구조를 꿰뚫어 봤다 해도 끊을 수 있는 고리가 없었다. 서기관 유수프가 매일 밤 검산한 숫자들이 작아지기 시작했을 때, 그것이 멈추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알았을 것이다. 다만 왜 멈추지 않는지를 장부에 적을 칸은 없었다.

칼리프 알-무크타디르가 932년 군 총사령관 무니스 알-무자파르와의 전투 중 전사했을 때2), 국고는 군 봉급을 낼 돈조차 없었다. 장부가 먼저 끝났다.


유수프가 그날 밤 세 번 확인한 숫자, 1억 200만 디르함은 아바스 황금기의 정점이었다. 그가 끝내 장부에 기록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그 숫자가 어디서 왔는지는 알았다. 다후칸의 수로, 사와드의 토지세, 실크로드의 관세. 그러나 그 숫자가 어디로 가는지는, 등잔불 세 개로도 보이지 않았다. 이브라힘의 손자 세대는 이미 바그다드를 떠나 이집트와 페르시아로 흩어졌다. 훗날 몽골의 군대가 바그다드 성문을 두드렸을 때, 그들이 무너뜨린 것은 이미 장부 안에서 오래전에 끝나버린 무언가의 빈 껍데기였다. 유수프는 등잔을 껐다. 멀리 동쪽에서도, 장부는 흔들리지 않는 제국처럼 쌓이고 있었다.

주석

1) Wikipedia 지즈야 항목은 쿠란과 하디스가 세율을 명시하지 않으며 적용 방식이 시대마다 달랐다고 기술하여, 고정 수치 1·2·4디나르를 직접 확인하지 않는다. (출처: Wikipedia: Jizya)

2) Wikipedia al-Muqtadir 항목은 그의 사망일(932년 10월 31일)을 확인하나, 무니스 알-무자파르와의 '전투 중 전사'라는 서술 대신 그의 죽음이 반란 과정에서 일어났음만 시사하며 교전 직접 전사 여부에 대한 명확한 서술은 제공하지 않는다. (출처: Wikipedia: Al-Muqtad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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