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발표하는 숫자를 우리는 의심하지 않는다. 통계청 보도자료에는 소수점 둘째 자리까지 적혀 있고, 뉴스 앵커는 그 숫자를 진지한 표정으로 읽으며, 우리는 그것이 현실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숫자는 현실의 반영이기도 하지만, 국가가 보고 싶은 현실의 설계이기도 하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은 처음부터 세지 않으면 된다.
752년 가을, 장안 호부(戶部)의 서기 위명(韋明)은 새벽부터 촛불을 켜고 앉아 있었다. 그의 앞에는 관중 지역에서 올라온 호적 장부 다섯 묶음이 쌓여 있었다. 종이마다 먹물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었고, 장부의 가장자리는 손때로 거무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위명은 손가락으로 숫자를 짚어가며 합산했다. 어제도 그제도 같은 숫자가 나왔다. 관중 어양현의 호구(戶口)는 3년 전과 한 명도 다르지 않았으며, 출생도 없고 사망도 없고 이주도 없었다. 현의 관리들이 3년마다 이전 장부를 그대로 베껴서 올린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장안에는 없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사실을 공식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숫자는 아름다웠고, 보고는 올라갔으며, 황제는 흡족해했다. 위명은 붓을 내려놓고 관자놀이를 눌렀다. 촛불이 꺼지기 전에 자신의 이름을 하단에 써 넣고 다음 묶음을 집어 들었다.
당나라가 세운 균전제는 인류 역사상 가장 야심찬 토지 분배 실험 중 하나였다. 21세 이상의 정남(丁男)과 18세 이상의 중남(中男)에게 구분전 80무(畝)와 영업전 20무를 합쳐 총 100무의 토지를 지급하고, 그 대가로 조(租)-곡물 2석, 용(庸)-20일간의 부역 또는 대납, 조(調)-비단 2장(丈) 및 비단 실 3냥을 납부하게 했다. 지금으로 치면 국가가 전 국민에게 기본 자산을 나눠주고 그 대신 세금과 군역을 요구하는 복지 계약이었다. 태종 이세민이 기틀을 닦고 현종의 개원(開元) 연간에 절정에 달한 이 체계는 수도 장안에 80만~100만 명의 인구가 먹고살 수 있는 재정을 공급했고, 동아시아 전역이 이 모델을 모방했다. 앞 챕터에서 살펴본 이슬람 제국이 신학으로 과세 정당성을 뒷받침했다면, 당나라는 제도의 정밀함 자체로 정당성을 만들었다. 한반도의 통일신라, 바다 건너의 일본도 당나라의 율령과 조세 체계를 들여와 자국의 행정에 이식했다. 제국의 장부는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이웃 나라들이 따라 그린 설계도였다. 당나라의 칸 안에 자신의 이름을 채워 넣으면 문명 국가가 되었다. 위명은 매일 아침 그 칸들을 손으로 확인했다. 묶음마다 같은 칸, 같은 순서, 같은 형식. 장부의 틀은 흔들리지 않았고, 틀 안에 채워진 숫자만 조금씩 죽어가고 있었다.
균전제의 치명적 결함은 설계 자체에 박혀 있었다. 토지를 받은 정남은 호적에 올라야 했고, 호적에 올라 있으면 조용조 의무가 따라붙었으며, 의무가 무거울수록 호적 밖으로 빠져나갈 이유가 커졌다. 측천무후 시대부터 토지 매매 제한이 풀리자 부유한 귀족과 사원이 소농의 땅을 빠르게 흡수했다. 토지를 잃은 농민에게는 두 길밖에 없었다. 지주의 소작인이 되거나, 호적을 버리고 도망치거나. 귀족의 장원(莊園) 안으로 숨어들면 지주에게 수확을 바치는 대신 국가의 장부에서는 존재가 지워진 인간이 될 수 있었다. 국가는 이들을 '객호(客戶)'라 불렀고 조용조 징수 대상에서 제외했다. 현종이 즉위할 무렵에는 전체 인구의 4분의 1가량이 호구 조사에서 이미 사라진 상태였다. 세금을 낼 사람은 장부에서 줄어들었는데 국경은 늘어났고, 군대를 유지하는 비용은 커졌으며, 호부의 수치는 여전히 아름다운 채로 남아 있었다. 사라진 것은 사람이 아니었다. 국가가 파악할 수 있는 인간들이 사라진 것이었다.
북방 변경에서 파견 나간 관리 하나가 현지 호적을 실사(實査)했더니, 장부에 기록된 정남의 절반이 이미 도망치거나 죽었다는 이야기가 귓속말로 돌았다. 빈 토지는 인근 지주가 흡수했고, 그 지주는 귀족이라 조용조 의무가 없었으므로 과세 기반의 절반이 허공에 떠 있었던 셈이었다. 그 관리는 이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다. 보고를 올리면 이전 장부를 올린 관리들이 묵인한 것이 드러나고, 그들의 상관도, 실사를 명령한 관리도 같은 연루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균열을 드러내는 것보다 덮는 쪽이 모두에게 유리했다. 제국의 재정은 실제 토지가 아니라 장부 위의 토지에서, 현실이 아니라 전임자의 글씨에서 나왔다. 위명이 어양현 장부를 어제와 똑같이 베껴 쓰고 자기 이름을 써 넣었을 때, 그 행위가 이미 그 연쇄의 일부였다. 당신이 그 자리였다면 어떻게 했을까.
755년 12월, 절도사 안록산이 범양(范陽)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균전제가 낳은 부병제(府兵制)가 무너지면서 국가는 돈을 주고 병사를 사야 했고, 그 병사를 관리하기 위해 절도사에게 군사·재정·행정 권한을 한꺼번에 넘겼다. 장부에서 사라진 인구가 절도사의 사병 명부로 옮겨 적혔다. 약 7년간(755~763) 이어진 안사(安史)의 난이 끝났을 때, 5,200만 명을 넘던 등록 인구가 1,600만 명대로1) 떨어져 있었고, 나라 전체 세수가 반 토막 났지만 전쟁 비용은 두 배가 되어 있었다. 위명의 후임자들이 새벽에 촛불을 켜고 앉아도, 더하고 빼야 할 숫자 자체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780년, 재상 양염(楊炎)이 황제 덕종에게 양세법(兩稅法)을 올렸다. 호적에 누가 등록되어 있는지를 보지 말고, 현재 어디에 살며 무엇을 가졌는지를 보라는 것이었다. 세금의 기준이 '등록된 사람'에서 '실제 자산'으로 이동했고, 수백 통씩 쏟아지던 임시 징세 명령도 여름과 가을 두 번의 정기 징수로 통합되었다. 서류는 줄었고 원칙은 분명해졌다. 제도가 마침내 현실을 따라잡은 것처럼 보였다.
그 반쪽짜리 승리가 어디로 이어지는지, 양염은 오래지 않아 알게 됐다. 양세법은 지역이 먼저 징수하고 남은 몫을 중앙에 올리는 방식으로 운용되었으므로, 절도사가 지방 경비와 군비를 먼저 충당한 뒤 남은 것만 장안으로 올리면 중앙이 받는 몫은 처음부터 절도사의 선의에 달려 있었다. 절도사들은 양세법 이후에도 중앙이 정한 액수를 초과해서 거두었고, 초과분은 자신의 군비로 돌렸으며, 황제는 이를 막을 힘이 없었다. 양세법은 절도사에게 이미 빼앗긴 과세권을 공식 문서로 인정한 것이었다. 장부를 바로잡기 위한 법이, 장부가 거짓말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제도로 굳혀버렸다.
균전제가 전국에 자산을 나눠줄 때 그 나눔을 기록한 장부는 동시에 과세 목록이었고, 그 목록에서 사라지는 것이 곧 자유였으니 장부가 정밀할수록 그 장부를 피해 달아날 방법도 교묘해졌다. 번영이 클수록 숨어든 사람이 많아졌고, 숨어든 사람이 많아질수록 장부는 더 크게 거짓말을 했다. 제국은 그 간격을 몰라서 무너진 것이 아니라, 그 간격 위에서 번영했기 때문에 무너졌다. 장부를 고치는 순간 고친 사람이 이전 장부를 묵인한 사람이 되었고, 그 연쇄는 황제의 이름이 적힌 칙령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양세법도, 균전제도, 그 이전의 모든 장부 개혁도 결국 같은 자리에서 멈췄다. 그것이 당나라를 죽였다.
위명이 그 촛불 아래 장부를 베끼던 해로부터 155년 뒤, 당나라는 군벌 주전충(朱全忠)에게 황위를 넘기고 사라졌다. 장안의 호부 청사는 불타지 않았고, 장부도 남아 있었으며, 숫자는 끝까지 아름다웠다. 다음 왕조를 세운 관리들이 그 서랍을 열었을 때, 그들이 발견한 것은 기록이 아니라 비어 있어야 할 자리를 채운 숫자들이었다. 위명이 이름을 써 넣은 그 묶음처럼, 장부를 거짓으로 만드는 힘은 언제나 장부 바깥에 있었다. 제국이 강건할수록 그 힘은 더욱 커졌다. 세금 기반이 사라지는 방식은 하나가 아니었다. 같은 시기 서쪽의 다른 제국에서는, 왕의 인장이 찍힌 구리판 한 장이 그 일을 했다. 그 판은 불에 타지 않았고, 대물림됐으며, 결국 제국이 사라진 뒤에도 남아 있었다.
주석
1) 위키피디아 당나라 항목은 안사의 난(755–763)으로 인한 '대규모 황폐화와 중앙 권위 쇠퇴'를 서술할 뿐, 5,200만 명→1,600만 명이라는 구체적 수치는 제시하지 않는다. (출처: Wikipedia: Tang dynas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