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세금을 거두지 못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는 안다. 창고가 비고, 공무원 월급이 밀리고, 군대가 녹슨다. 그런데 더 조용하고 더 느린 방식도 있다. 징수 기관은 멀쩡히 작동하고, 감독관은 여전히 출근하고, 장부도 정확하게 기록되는데, 거둬들인 돈이 향하는 목적지가 조용히 달라지는 것이다. 세금은 걷히고 있는데 창고는 빈다. 그 전환이 서류 한 장으로 가능할 때, 제국은 소리 없이 비어간다.
서기 5세기, 북인도. 마가다 왕국의 어느 마을 끝자락, 사원 회계 담당자 수리아다스는 손에 구리판 하나를 들고 있었다. 마을 북쪽 논밭 열두 마지기를 스칸다굽타 왕이 이 사원의 수석 사제에게 영구히 하사하며 세금을 면제한다는 내용이었다. 수리아다스는 장부를 펼쳐 그 땅에서 해마다 왕실 창고로 들어오던 수확의 6분의 1을 한 줄로 지웠다. 잉크가 선명히 스며들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날도 논에서 일했고, 아이들은 학당에서 산스크리트를 읽었으며, 누구도 이것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묻지 않았다. 묻지 않았다는 것 자체가 이미 구조의 일부였다. 그 구리판은 지워지지 않았다. 대물림됐다.
굽타 왕조는 서기 320년에서 550년 사이 북인도를 지배했고, 칼리다사가 시를 썼고, 아리아바타가 위치 기수법 체계 안에 0의 개념을 묵시적으로 담아냈으며1), 아잔타 석굴의 벽화는 지금도 색이 살아 있다. 파탈리푸트라의 거리에는 상인과 학자와 순례자가 뒤섞여 걸었고, 벵골만의 항구에는 중국과 로마에서 온 배가 닿았다. 후대는 이 시기를 인도의 황금기라 불렀다.
그 황금기의 뒤편에서 수리아다스의 장부가 한 줄씩 지워지고 있었다. 굽타 왕조의 재정은 농업 위에 세워져 있었다. 수확의 6분의 1, 때로는 4분의 1을 바가(bhaga)라 불리는 토지세—비문에서는 바가카라(bhagakara)로도 표기된다—로 거둬들였고, 그 징수 체계는 지금으로 치면 국세청과 지방세무서와 동사무소를 수직으로 연결한 구조와 같았다. 수도 파탈리푸트라의 회계 관청 악샤파탈라에는 고파스라민이라는 직함의 관리가 장부를 검토하고 미납 세금을 추적했으며, 마을마다 촌장과 원로가 주도하는 공동체 기구가 세금을 걷어 올려 보냈고, 지역 감독관 비샤야파티와 중앙 파견 고위 관리 쿠마라마트야가 그 흐름을 감독했다. 여러 겹으로 쌓인 깔때기를 통해 왕실 금고로 흘러 들어오는 구조였다.
찬드라굽타 1세가 마가다를 통합하고 왕중왕의 칭호 마하라자디라자를 선언한 뒤, 그의 아들 사무드라굽타는 사방으로 정복 원정을 떠났다. 알라하바드 석주 비문에는 그가 북인도에서 굴복시킨 9명, 남인도에서 굴복시킨 12명의 왕 이름이 새겨져 있다. 상인 조합 스레스티가 파탈리푸트라에서 벵골만 항구 탐랄리프티까지 비단과 면포와 후추를 실어 날랐고, 금화 디나라가 로마와 중국과 동남아시아를 향해 흘렀으며, 4세기 후반 굽타의 왕실 창고는 가득 찼다. 앞 챕터에서 로마의 데나리우스가 함량을 잃어가던 바로 그 무렵, 인도의 금화는 반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순도 90퍼센트를 웃도는 굽타 금화가 실크로드의 기준 통화 역할을 맡았다. 풍요는 진짜였다. 그러나 왕국이 부유해질수록 왕은 신의 대리자임을 입증하고 싶어했고, 그 욕망이 열어놓은 구멍으로는 창고가 채워지기도 전에 무언가가 새어나가기 시작했다.
찬드라굽타 2세는 힌두 사원과 불교 비하라에 아낌없이 기부했다. 중국 순례자 파현은 405년경 굽타 영토를 여행하며 사원은 넘치고 시장은 활기차고 왕은 관대하다고 기록했다. 파현이 본 것은 사실이었다. 다만 그 관대함이 어떤 구조 위에서 작동하는지는 기록에 없었다. 면세 토지, 즉 아그라하라는 처음에 왕국 외곽의 황무지와 미개간 삼림이었다. 사제들은 이 땅을 일구어 농촌 공동체를 만들고 베다를 가르치고 의례를 집전했으며, 왕실의 입장에서는 개간이라는 실리와 신성한 권위라는 명분을 동시에 얻는 거래였다. 당장은 모두가 이득을 보는 합리적인 구조였다. 달력을 보지 않고 봄날만 즐기는 사람처럼, 당장 보이는 풍요가 그 뒤의 계산을 가리고 있었다.
기부는 계속 이루어졌고, 면세 토지는 해마다 늘어났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이 반복될 때마다 경쟁하는 왕들은 지지 세력을 붙들기 위해 점점 더 기름진 면세 토지를 내놓았으며, 아그라하라는 황무지에서 이미 일구어진 논밭으로 옮겨갔다. 악샤파탈라의 장부에서 지워지는 줄이 쌓여갔다. 당신이 그 고파스라민이었다면, 왕이 서명한 구리판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었을까. 스칸다굽타가 제위 다툼 끝에 권좌에 오른 455년 이후로 그 속도에는 가속도가 붙었다. 비타리 석주 비문에는 그가 비슈누 사원에 마을 하나를 통째로 넘겼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다. 단 하나의 사원에 마을 하나 전체였다. 수확의 6분의 1이 왕실 창고가 아니라 사원의 보관실로 방향을 틀었고, 그 전환은 왕의 인장이 찍힌 채로 이루어졌으며, 아무도 불법이라 부를 수 없었다.
마을 한가운데 사원이 서면 그 사원은 창고이자 법정이자 은행이 되었다. 사제는 소작인과 계약을 맺고 수확의 일부를 거뒀고, 땅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았으며, 분쟁을 중재하고 벌금을 징수했다. 흉작이 든 해에 농민이 씨앗을 빌려야 할 때 찾아가는 곳도 국가의 창고가 아니라 사원의 창고였다. 그 구조는 바가와 정확히 같았지만, 공의 재정이 아니라 사원의 재정으로 흘렀다. 국가가 해야 할 일들이 하나씩 사원으로 넘어갔다. 고파스라민이 그 사실을 알아챌 즈음에는, 이미 구조 자체가 달라진 뒤였다. 세금을 걷는 체계가 멀쩡히 작동하는 동안에도, 그 체계가 모으는 돈의 양은 줄고 있었다. 수리아다스의 손이 장부 위에서 지우고 있는 그 줄이, 왕국 전역에서 같은 속도로 반복되고 있었다.
수리아다스가 사원 앞 계단에 앉아 있던 그해, 서쪽에서 훈족이 국경을 두드리고 있었다. 스칸다굽타는 여러 차례 그들을 막아냈지만 전비는 어마어마했다. 왕실 창고의 금화 디나라는 점점 가벼워졌다. 4세기에 90퍼센트를 웃돌던 순도가 5세기 들어 내려앉자 로마와의 교역에서 신뢰가 흔들렸고, 만다소르 비문에는 구자라트의 비단 직공 조합이 말와로 이주해 436년경 태양신 사원을 건립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장인들이 도시를 떠났고, 시장이 조용해질수록 세금도 줄었다. 남은 기름진 땅은 이미 사원이 쥐고 있었다.
왕실이 전비를 마련하는 방법은 한정되어 있었다. 함량을 낮춘 금화를 더 많이 찍거나, 아직 면세가 되지 않은 땅에서 더 많이 쥐어짜거나. 두 방법 모두 썼다. 금화 함량이 떨어지자 교역 상대들이 먼저 알아챘고, 세율을 높이자 농민들이 면세 사원 소작인 자리를 찾아 땅을 버리기 시작했다. 사원에 기댈수록 과세할 수 있는 땅은 좁아졌고, 땅이 좁아질수록 왕은 더 많은 것을 약속해야 했으며, 더 많이 약속할수록 땅은 더욱 좁아졌다. 이 순환의 끝에서 무엇이 기다리는지, 악샤파탈라의 장부를 한 자리에 펼쳐놓은 고파스라민이라면 볼 수 있었다. 다만 볼 수 있는 것과 바꿀 수 있는 것은 달랐다. 훈족이 국경 바깥에서 기회를 재고 있을 때, 굽타의 진짜 균열은 안쪽에서 자라고 있었다.
역사가들은 오랫동안 굽타의 멸망 원인을 훈족 침략에서 찾았다. 군사적 패배가 먼저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훈족이 마지막 타격을 가하기 훨씬 전에 장부는 이미 비어 있었다. 군대가 녹슬기 전에 창고가 먼저 비었고, 창고가 비기 전에 세금 기반이 먼저 빠져나갔다. 그 소멸이 왕의 서명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 핵심이다.사원이 권력을 빼앗은 것이 아니었다. 왕들이 스스로 권력의 기반을 비우면서 사원에게 주었다. 지지 세력이 필요할 때마다 세금 기반을 내놓았고, 그것이 당장의 위기를 넘기는 가장 빠른 방법이었으며, 그 방법을 반복할수록 다음 위기를 버틸 기반이 사라졌다. 왕이 사원에 기대는 순간 종속되었고, 종속된 왕은 더 많이 기댔으며, 더 많이 기댈수록 더 깊이 종속됐다. 구리판에 서명하는 손이 스스로 왕관의 무게를 덜어내고 있었다. 뒤를 이은 팔라 왕조, 라슈트라쿠타 왕조, 찰루키아 왕조가 같은 선례를 그대로 따랐다. 황금기의 진짜 유산은 아잔타의 벽화가 아니라 왕권이 흔들릴 때마다 세금 기반을 신성한 기관에 넘기는 방식이었다.
왕은 구멍이 어디 있는지 알고 있었다. 악샤파탈라의 장부를 왕국 전역에서 한 자리에 모을 수 있는 사람이 왕뿐이었고, 수리아다스의 한 줄이 왕국 전역에서 같은 속도로 반복된다는 것도 왕뿐이 볼 수 있었다. 그 왕이 오늘도 구리판에 서명하고 있었다. 수리아다스가 잉크로 그은 그 한 줄은 너무 작았고, 같은 한 줄이 왕국 전역에서 반복될 때 그것들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사람은 왕뿐이었다. 그 왕이 구멍을 만들고 있었다.
수리아다스는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가 밥을 먹었고, 그의 아이들은 사원 옆 학당에서 산스크리트를 배웠으며, 사원은 여전히 황금기를 누리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비단 직공은 이미 짐을 싸고 있었지만, 수리아다스의 마을에서는 아직 아무것도 달라 보이지 않았다. 그가 장부에서 지운 한 줄은 작았다. 구리판은 지워지지 않고 대물림됐고, 굽타의 뒤를 이은 왕조들이 그 구리판을 읽고 그대로 따라 썼을 때, 훨씬 먼 동쪽에서는 아예 종이 위에서 이 문제를 풀려는 시도가 시작되고 있었다. 세계 최초의 지폐로.
주석
1) 힌두-아라비아 수 체계의 완전한 자릿값 체계는 8~9세기에야 확립되었다는 연구가 있어, 아리아바타가 0을 이미 담아냈다는 주장에 시기적 논란이 존재한다. (출처: History of the Hindu–Arabic numeral system,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