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 안에 지폐가 있다면, 그것은 누군가의 약속이다. 한국은행이 그만한 가치를 보증하겠다는 서명이 인쇄돼 있고, 당신은 그 약속을 믿기 때문에 물건을 사고 월급을 받는다. 금고 안에 황금이 쌓여 있어서가 아니다. 믿음이 쌓여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믿음은 언젠가 처음으로 시작됐을 것이다. 누군가 처음으로 종이 한 장을 건네며 "이것이 돈이오"라고 말했을 때, 상대방이 그것을 받아 든 순간. 그 장면은 1023년, 중국 사천(四川) 지방의 한 관청 창고에서 일어났다.
1073년 가을, 청두(成都)의 교자무(交子務) 안에서 관리 하나가 장부를 펼쳤다. 등불 아래 종이 더미가 산을 이루고 있었다. 손가락이 숫자를 훑는 동안 이마에 땀이 맺혔다. 발행 잔고는 1,258만 민(緡), 준비금은 36만 민. 비율로 치면 서른다섯 배였다. 그는 붓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숫자가 틀릴 리 없었고, 틀릴 수 없기에 더 무서웠다.
창문 너머로 시장 소리가 흘러 들어왔다. 흥정 소리, 저울 소리, 발걸음 소리. 상인들은 무거운 철전 꾸러미 대신 손바닥만 한 종이를 주고받으며 비단과 차와 도자기를 거래하고 있었다. 교자 한 장은 소매 안에 들어갔다. 수요는 늘어나는데 준비금은 그대로였다. 황제의 칙령이 발행 한도를 올렸다. 그 관리는 먹물을 찍고 서명란 앞에 멈췄다. 서명을 하면 이 숫자가 내일 시장 바닥으로 나간다.
송나라가 지폐를 발명한 것은 천재성 때문이 아니었다. 무게 때문이었다. 사천 지방은 동(銅)이 귀해 철전을 썼는데, 철전은 동전 가치의 10분의 1이어서, 같은 액면을 맞추려면 동전의 몇 배 무게를 져야 했다. 비단 한 꾸러미를 사려면 수레 한 대 분량의 쇳덩이를 끌고 나와야 했다. 청두의 상인들은 번거로움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해결책을 찾았다. 신뢰받는 점포에 철전을 맡기고 영수증을 받아 물건을 샀다. 그 영수증이 다시 물건을 사는 데 쓰였다. 교자(交子), 문자 그대로 '교환하는 종이'였다.
처음에는 16개 교자포(交子鋪)가 조합을 이루어 발행했다. 창고에 쌓인 쇳덩이가 신뢰의 근거였고, 어느 점포가 야반도주하거나 쇳덩이를 빼돌리면 교자는 그 자리에서 휴지 조각이 됐다. 1023년, 인종(仁宗) 황제는 민간의 아이디어를 국가 제도로 흡수했다. 청두에 교자무를 설치하고 36만 민의 철전을 준비금으로 비축한 다음, 125만 6,340민 어치의 교자를 발행했다. 준비율 약 28퍼센트, 근대 중앙은행 기준으로도 준수한 수치였다. 교자는 2년 기한이 있었고 만기가 되면 동전이나 새 교자로 교환해주었다. 반드시 바꿔준다는 국가의 보증이 붙었다. 시한부 약속이 오히려 신뢰를 높인 것이었다. 상인들은 기꺼이 받았고, 청두 비단 시장의 거래량이 눈에 띄게 늘었다. 무거운 철전이 창고에 잠기는 동안, 가벼운 종이가 시장 한 바퀴를 더 돌았다. 유통 속도가 빨라진다는 것은 같은 돈으로 더 많은 거래가 가능해진다는 뜻이었다.
교자무 창고 바깥 골목에서 동료 관리 하나가 비단 상인 진백(陳柏)을 마주쳤다. 진백은 교자 열 장을 소매 깊숙이 꽂고 다녔다. 열 장이면 가게 재고 전부를 살 수 있는 액수였다. 장부에서 우려하던 숫자가 진백의 소매에서는 안도였다. 그 안도가 언제까지 버텨줄지, 창고의 관리는 알 수 없었고, 진백도 묻지 않았다. 묻지 않는 것이 시장의 방식이었고, 그 방식이 교자를 살게 했다.
당나라가 귀족 중심의 농업 국가로서 호적에 묶인 토지와 노동력에서 세금을 뽑아냈다면, 송나라는 상인과 장인이 만들어 가는 도시 국가에 가까웠다. 수도 개봉(開封)의 인구는 100만 명을 넘었다. 야시장이 열렸고, 찻집이 줄지어 섰으며, 밤에도 등불이 꺼지지 않았다. 같은 시기 서유럽 최대 도시였던 파리의 인구는 5만~10만 명 수준이었다. 12세기 송나라의 국내 총생산은 당시 유럽 전체의 약 세 배로 추산된다. 교역 상품에 부과한 관세는 비교적 낮은 수준으로, 유럽 군주들이 상인의 목을 조르던 방식과 달리 송 조정은 자주 조금씩 거두는 쪽을 택했다. 시장이 클수록 국가가 이익을 봤고, 그 논리가 교자를 밀어 올렸다. 1085년 무렵, 전국 17개 조폐소에서 연간 약 50억 개의 동전이 주조됐다. 그래도 모자랐다. 경제 규모가 화폐 공급을 앞질렀고, 교자는 그 간극을 메우는 도구였다. 도구가 너무 잘 돌아갈 때 무슨 일이 생기는지는, 그 장부를 쓴 관리가 이미 알고 있었다.
수요가 늘수록 발행량은 늘었고, 발행량이 늘수록 준비금 비율은 떨어졌다. 1072년에 한도가 두 배로 오른 데 이어, 1106년 발행 잔고는 2,600만 민에 달했다. 1023년 최초 발행량의 스물한 배였다. 준비금은 여전히 36만 민 근방에서 움직였다. 교자는 이미 종이가 아니었다. 발행 기관의 지급 의지만 남아 있는 순수한 약속이 됐다. 그 약속을 뒷받침하는 것은 이제 철전 창고가 아니라 황제의 권위였다. 소매 안에서 안도로 잠들던 그 종이 열 장이 서서히 무게를 잃어가고 있었다.
창고의 관리가 우려한 것은 정확했다. 그런데 반전은 그가 우려한 방향이 아니었다. 약속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교환이 거부되면서부터였다. 교자를 가져온 상인이 동전으로 바꿔 달라고 하면 창구에서는 준비금이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소문이 시장을 달렸다. 진백 같은 상인은 비단을 교자로 팔기를 꺼렸다. 1관(貫)짜리 교자가 시장에서 수십 문(文)에 거래됐다.
1105년, 송 조정은 교자를 폐기하고 전인(錢引)을 새로 발행했다. 새 이름으로 똑같은 종이를 찍은 셈이었다. 전인은 교자보다 빠르게 신용을 잃었다. 남송(南宋) 시대에는 전인도 버려지고 회자(會子)가 등장했다. 이름이 두 번 바뀌는 동안 원리는 한 번도 바뀌지 않았다. 군비가 필요하면 찍고, 준비금이 없으면 폐기하고, 신뢰가 무너지면 이름을 교체했다. 교자가 회자가 되는 동안, 청두의 시장은 매번 잠깐 얼어붙었다가 다시 열렸다. 상인들은 새 종이를 받았고, 또다시 소매 안에 접어 넣었다.
그런데 지폐가 세 번 폐기되는 동안, 그것이 증명한 원리는 살아남았다. 돈이 금속이 아니어도 된다는 것. 약속 자체가 가치를 운반할 수 있다는 것. 이 발상은 몽골을 거쳐 원(元)나라로 흘러들어갔다. 1260년 쿠빌라이 칸은 교초(交鈔)를 법정 통화로 선포하고, 금과 은의 사적 거래 및 보유를 금지했다. 초기에는 은을 준비자산으로 삼아 교환을 보증했으나, 이는 제국 전역에서 지폐를 사실상 유일한 교환 매체로 강제 유통시킨 최초의 사례였다. 마르코 폴로는 원나라를 종이로 경제를 움직이는 경이로운 제국이라고 기록했고, 중세 유럽 독자들은 그가 과장한다고 의심했다. 17세기 유럽의 은행들이 같은 논리로 예금 증서와 지폐를 발행하기 시작했을 때-스웨덴의 스톡홀름 방코가 1661년 유럽 최초의1) 유통 지폐를 찍어냈을 때-그들은 자신들이 천 년 전 청두의 교자포를 재발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잉글랜드 은행은 1694년에 설립됐다. 초기에는 금태환 지폐를 발행했으나, 이후 점차 준비금을 초과하는 화폐를 유통시키는 방식으로 이행했다. 오늘날 모든 중앙은행이 작동하는 방식이다. 준비금의 몇 배를 유통시키는 이 구조를 현대 경제학은 부분준비제도라 부른다. 원리는 죽지 않았다. 죽은 것은 언제나 그 원리를 통제하려 한 국가의 의지였다.
그 밤 결국 장부에 서명이 찍혔다. 도장은 다음 날 시장으로 나갔고, 비단과 교환됐다. 그럼에도 청두의 시장은 그다음 날도 열렸고, 다음 왕조 아래서도 열렸다. 오늘날 주요 선진국 중앙은행의 본원통화 대비 광의통화 배율은 수 배에서 수십 배에 이르는 범위에 걸쳐 있으며, 미국 연방준비제도도 그 범위 안에 있다. 1073년 밤 그 관리를 얼어붙게 했던 서른다섯 배는, 천 년 뒤 금융 표준의 절반도 되지 않는 숫자가 됐다. 믿음이 살아 있는 한, 종이는 충분히 돈이었다. 그 믿음을 먼저 무너뜨린 것은 언제나 상인이 아니라 황제의 서명이었다. 서명란에 먹물을 찍던 그 손과, 발행 한도를 올린 황제의 손이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는 것을, 그는 그날 밤 알았을까. 청두에서 멀리 떨어진 동남아시아의 밀림 속에서는, 같은 문제를 다른 재료로 쌓아 올리고 있는 제국이 있었다. 쌀이 아니었다. 물이었다.
주석
1) 스톡홀름 방코는 1657년 설립·1661년 지폐 발행이 맞으나, 관련 학술 자료(Mastering the narrative, 2022)는 이 은행이 '수년 후 파산했다'고 기술하며 최초성 자체보다 제도적 재건 과정을 분석하고, 비교사 연구(From Chengdu to Stockholm, 2012)는 동서 지폐 출현 시기에 대해 '직접적 비교 시도가 드물었다'고 인정해 '유럽 최초'라는 선언적 수식어가 학계에서 논쟁 없이 확정된 것은 아님을 시사한다. (출처: Mastering the narrative and the dirty tricks of trade: The re-establishment of a Swedish bank in 1668 (2022); From Chengdu to Stockholm: A Comparative Study of the Emergence of Paper Money in East and West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