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회계 16화 — 앙코르의 물값

수도꼭지를 생각해 보라. 틀면 물이 나오고, 잠그면 멈춘다. 그 뒤에 무엇이 있는지-댐이 있고, 정수장이 있고, 수백 킬로미터의 관로가 땅 아래를 달리고 있다는 것을-우리는 대략 알지만 실제로 확인하지 않는다. 시스템이 돌아가는 동안에는 그럴 이유가 없다.

1296년 10월, 앙코르 서쪽 바라이의 운하 관리인 소마도 그렇게 믿었을 것이다. 시스템이 살아 있는 한, 내일의 물은 늘 거기 있을 것이라고. 새벽 네 시, 소마는 횃불을 들고 둑길을 걷는다. 발밑에서 흙이 축축하게 눌린다. 어젯밤 비가 수위를 높여놓았다. 서쪽 바라이는 길이 약 7.8킬로미터, 폭 약 2.1킬로미터의, 도성 전체를 품을 수 있는 인공 호수다. 소마는 수위를 확인하고 밸브 돌을 조절해 하류 논밭으로 물을 흘려보낸다. 수문을 잘못 열면 하류 마을이 잠기고, 너무 늦게 열면 논이 마른다. 소마의 손이 곧 왕국의 밥이다. 품삯은 쌀로 받는다. 정해진 몫이 매 계절 배분되고, 노역 면제 증서가 그의 신분을 보증한다. 왕은 신이고, 물은 왕의 것이고, 물을 다루는 자는 왕의 손이다. 소마는 이 질서가 옳다고 믿는다. 다만 한 가지가 마음에 걸린다. 서쪽 운하 구간 퇴적물이 무릎까지 차올랐다. 상관에게 인력을 요청하는 문서를 올렸지만 회신이 없었고, 공사장에서 사람을 빼기 어렵다는 말만 돌아왔으니 내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오늘은 오늘의 물을 흘려보내야 한다.


크메르 제국의 번영은 수학 문제였다. 톤레사프 호수 북단에 자리한 앙코르는 계절마다 극단을 오가는 땅이었다. 우기에는 호수가 다섯 배로 불어 들판을 삼키고, 건기에는 땅이 갈라져 먼지가 일었다. 이 변덕스러운 자연을 길들인 것이 수리 시스템이었다. 9세기부터 왕들은 거대한 저수지 바라이를 파고, 수백 킬로미터의 운하를 뚫고, 수문과 배수로를 연결했다. 9세기 말 야쇼바르만 1세가 완성한 동쪽 바라이는 길이 약 7.2킬로미터, 폭 약 1.7킬로미터에 달했다. 항공기에서 레이저를 쏘아 지형을 입체로 읽어내는 라이다 기술로 드러난 앙코르의 수리 인프라는 수백 평방킬로미터를 덮는 운하와 둑과 저수지의 네트워크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광대한 산업화 이전 도시 복합체였다. 소마가 새벽마다 걷는 그 둑길은 그 네트워크의 말단 신경 하나였다. 말단이 살아 있어야 심장도 뛸 수 있었다.

이 시스템이 만들어낸 것은 잉여였다. 우기의 홍수를 담아두었다가 건기에 논밭으로 내보내면, 연중 두 번에서 세 번 쌀 수확이 가능했다. 앙코르를 13세기 전성기에 70만~90만 명이 살던 도시로 만든 것은 신의 가호가 아니라 저수지의 용량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국가 관개청과 조세청을 한데 묶은 시스템이었다. 잉여 쌀은 세금 기반이었다. 농민은 수확의 일부를 현물로 납부하고 노역으로 왕의 공사에 동원되었으며, 비문에는 쌀, 천, 꿀, 밀랍 등 구체적인 세목이 빼곡히 새겨져 있었다. 소마 같은 운하 관리인부터 사원 무희, 병사, 제관까지, 앙코르의 모든 직능은 이 잉여 위에 쌓인 탑이었다. 앞 챕터의 송나라가 지폐로 잉여를 압축했다면, 크메르는 물로 잉여를 창출했다. 탑이 높아질수록 탑을 받치는 물의 무게도 커졌으나, 시스템이 그 무게를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를 아무도 계산하지 않았다.

자야바르만 7세의 재위(1181년~약 1218년)는 크메르 제국 역사에서 가장 빛났고, 가장 위험했다. 즉위 초, 그는 참파 왕국의 침공으로 초토화된 앙코르를 수복하고 역대 가장 광대한 영토를 통합했다. 그러나 진짜 야망은 석조물에 있었다. 자야바르만은 재위 30년 동안 타프롬, 프레아칸, 앙코르톰, 바욘을 차례로 완공했다. 타프롬 한 사원만 유지하는 데 8만 명이 배속되었다고 비문은 기록했다. 대사제 18명, 무희 615명, 여기에 잡역부와 노역자를 합산한 수였다. 게다가 자야바르만은 왕국 곳곳에 121개의 여인숙과 102개의 병원을 세웠다. 명분은 백성을 위한 복지였지만, 병원도 여인숙도 노역으로 지어졌고 유지 비용도 세금에서 나왔다. 그 모든 인력을 먹여 살릴 식량은 어디서 왔는가. 운하에서, 저수지에서, 소마의 손에서 왔다. 건설이 클수록 농민의 손이 더 오래 논을 비워야 했고, 논을 비운 손이 돌아오지 못하는 동안 운하는 기다려주지 않았다.

자야바르만이 사망한 1218년 이후, 비문이 갑자기 줄었다. 새 석조 기념물도 더 이상 세워지지 않았다. 석수들이 뿔뿔이 흩어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을 먹일 쌀이 줄어들고 있었다. 이 침묵은 왕조 교체가 아니라 국고의 바닥을 가리켰다. 세금 기반이 흔들리면 운하 유지에 쓸 인력도 사라졌고, 인력이 사라지면 다음 수확은 더 적어졌으며, 수확이 적어지면 다시 세금이 줄었다. 소마가 보고한 서쪽 구간 퇴적물처럼, 문제는 이미 조용히 쌓이고 있었다. 다음에 무너질 구간이 어디인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고, 아무도 묻지 않았다.

소마가 서쪽 구간 보고서를 올린 지 얼마나 됐는지 그는 더 이상 기억하지 못했다. 회신이 오지 않는 것도 이제는 놀랍지 않았다. 운하 바닥에 퇴적물이 불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상류 삼림이 사원 건축과 농지 확장으로 벌채되면서 흙이 빗물에 씻겨 내려왔다. 운하 청소는 하급 관리인의 몫이었지만, 농번기에는 논에 나가야 했고 농한기에는 공사장에 끌려갔다. 소마가 올린 보고서는 상관의 책상에서 기다렸고, 상관의 답은 늘 같았다. 사람을 댈 형편이 안 된다고, 공사가 먼저라고. 소마는 그 답을 이해했다. 그것이 문제였다.


1431년 태국 아유타야 왕조가 앙코르를 점령1)했을 때, 병사들이 마주한 것은 이미 반쯤 비어 있는 도시였다. 교과서는 이 군대를 제국의 종말로 기록했지만, 칼보다 먼저 도착한 것이 있었다. 14세기 중반부터 나무 나이테 기록으로 복원된 수문 자료는 앙코르 지역이 수십 년에 걸쳐 극심한 가뭄과 강력한 몬순이 교차했음을 보여줬다. 바라이가 이미 퇴적물로 기능을 잃어가는 상태에서 폭우가 쏟아지면 대규모 침수가 일어났다. 침수는 운하망을 더욱 손상시켰고, 손상된 운하망은 다음 가뭄을 더 치명적으로 만들었다. 시스템은 자신을 먹으며 무너졌다.

그 역설의 핵심은 건설 자체에 있었다. 멈추는 왕은 신이기를 포기하는 왕이었고, 신이 아닌 왕은 노역을 명령할 수 없었으며, 노역이 없으면 운하를 고칠 수 없었다. 운하가 막히면 쌀이 줄었고, 쌀이 줄면 세금이 줄었으며, 세금이 줄면 다음 건설은 더 작아져야 했다. 더 작은 건설은 왕의 권위가 꺾였다는 신호였고, 약해진 권위는 다시 세금 기반을 흔들었다. 이 고리 어디서도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건설을 줄이면 고리가 느슨해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 방향으로 조여들었다. 수리 기술이 작동했기에 70만 명을 먹여 살릴 수 있었고, 70만 명이 있었기에 사원 건설 수요가 생겨났으며, 그 수요를 충족하려 할수록 시스템의 토대가 닳아갔다. 제국을 무너뜨린 것은 실패가 아니었다. 성공이었다.

소마는 퇴적물을 봤고, 상관도 퇴적물을 알았으며, 왕의 재무 담당관들도 비문이 줄어드는 것을 숫자로 읽었을 것이다, 몰랐던 것이 아니었다. 건설을 멈추는 결정은 당장 세금 기반을 지키는 선택이었지만, 동시에 왕의 신성을 걷어내는 결정이었다. 그 결정을 내린 왕은 다음 계절에 왕좌에 없었을 것이다. 알아도 바꿀 수 없었다. 그래서 소마는 오늘도 밸브 돌을 돌렸다.


소마는 그날도 새벽 네 시에 수문 앞에 섰다. 횃불 빛이 바라이의 수면 위에서 흔들렸다. 밸브 돌을 돌리자 물이 어둠 속으로 흘러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1296년 앙코르를 방문한 중국 외교관 저우다관(周達觀)은 궁궐의 금탑, 가득 찬 시장, 물길을 가로지르는 다리들을 번화하고 풍요롭다고 기록했다. 그로부터 겨우 한 세대 뒤, 도시는 텅 비어갔다. 저우다관이 목격한 화려함이 파국 직전의 빛이었듯, 소마가 날마다 흘려보내는 물도 그 빛의 일부였다. 그의 발소리가 어둠 속으로 멀어지는 동안, 운하 바닥에서는 진흙이 조금씩 더 쌓였다. 바라이의 수면은 여전히 고요했다. 그 고요함이 오래가지 않으리라는 것을, 수면은 말하지 않았다. 한 세기 뒤, 이 폐허를 거쳐 지나갈 군대는 정착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토지를 경작하는 대신 세금 제도 자체를 통째로 들고 이동했다.

주석

1) 2023년 연구는 1431년 아유타야 침공이 앙코르 쇠퇴의 직접 원인이라는 통설에 이의를 제기하며, 실제 쇠퇴는 수백 년에 걸친 점진적 과정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출처: Perspectives on the 'Collapse' of Angkor and the Khmer Empire,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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