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회계 17화 — 징기스칸의 세금 청구서

전쟁에서 이긴 나라가 진 나라에 가장 먼저 하는 일이 무엇일까. 군대를 주둔시키는 것도, 지도자를 교체하는 것도 아니었다. 바로 세금 제도의 이식이다. 2003년 이라크를 점령한 미국이 가장 먼저 파견한 것은 전투 병력이 아니라 재정 고문단이었고, 그들의 첫 번째 임무는 이라크의 세수 구조를 파악하고 새 징세 체계를 심는 일이었다. 정복은 하루에 끝났지만 장부는 그다음 날부터 시작됐다. 이 원리를 역사상 가장 극단적으로 실험한 자들은, 정작 장부가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말 위에 올라탄 사람들이었다.

1262년 봄, 카이펑(開封) 외곽 세무 관청. 하늘이 채 밝기도 전에 한인 관리 왕명의(王明義)는 털 외투를 걸친 채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촛불 하나가 두꺼운 마지 위의 숫자들을 흔들리며 비췄다. 손끝이 차가웠다. 화북 일대 세 고을의 수확량을 집계하고, 새 주인들에게 바칠 곡물량을 산정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새 주인은 몽골인들이었다. 장부를 펼치자마자 왕 명의는 멈췄다. 숫자가 맞지 않았다. 지난해보다 생산량은 줄었는데 징수 목표치는 오히려 늘어 있었다. 담당 몽골 관리인 다루가치(達魯花赤)가 상부 지시라며 전달한 새 기준이었다. 목표치를 채우려면 굶주린 농민들에게서 씨앗 곡물까지 걷어야 했다. 씨앗을 잃은 농민은 다음 해 심을 것이 없었다. 씨앗 없는 들판은 이듬해의 세금도 없앴다. 왕명의는 붓을 내려놓았다. 창밖 들판이 아직 어두웠다. 그는 붓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그래도 썼다. 그날 아침 그가 왜 다시 붓을 집어 들었는지, 아무도 묻지 않았다.


칭기즈칸은 세금을 몰랐다. 문자도 몰랐다. 그가 자란 몽골 초원에는 장부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부족에서 부족으로 흘러다니는 물자는 약탈이거나 증여였고, 어느 쪽도 기록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1206년 몽골 고원의 대칸이 되어, 이어 거대한 정주(定住) 문명들을 하나씩 집어삼켰다. 호라즘 제국이 먼지가 됐고, 금나라의 수도 중도(中都)가 불탔다. 아무것도 쌓지 않던 사람이 모든 것을 쌓아온 사람들의 땅 위에 섰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무너뜨리는 것과 다스리는 것은 전혀 다른 기술이었다. 수십만 명의 농민에게서 매년 곡물을 걷으려면 붓과 장부가 칼보다 먼저 있어야 했다. 오고타이 칸(재위 1229~1241)은 거란족 출신으로 금나라에서 관직을 지낸 야율초재(耶律楚材)를 기용해 제국 최초의 체계적 세금 제도를 설계하게 했다. 지금으로 치면 기획재정부와 국세청을 동시에 세운 셈이었다. 야율초재가 처음 오고타이 앞에 섰을 때, 칸의 막사 안에는 전리품이 쌓여 있었고 장부는 없었다. 야율초재는 붓을 꺼냈다. 그것이 몽골 제국에서 진짜 정복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야율초재가 설계한 제도는 단순했다. 땅과 인구를 조사하고, 경작지별 수확량을 추산한 뒤, 일정 비율을 세금으로 정했다. 그는 발행 가능한 교초(交鈔) 상한을 스스로 못 박았고, 몽골 귀족들이 점령지 농민을 노비로 끌어가는 관행을 막으려 했다. 살아 있는 농민만이 내년 세금을 낼 수 있다는 논리였다. 그 논리는 옳았다. 그러나 초원의 관습은 장부보다 먼저였다. 분봉(分封)된 땅에서 몽골 귀족들이 독자적으로 세금을 걷는 권리를 주장하면서, 한 농민이 두 장부 앞에 서는 구조가 생겨났다. 조정의 장부와 지역 다루가치의 장부가 같은 농민 앞에 따로 펼쳐졌고, 그 둘을 합산한 결과를 메우는 것은 언제나 농민의 등허리였다. 왕명의의 아버지 세대가 처음 경험하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충돌이었다. 두 개의 청구서 사이에서 왕명의의 촛불은 매년 더 빨리 타들어가고 있었고, 그것은 아직 시작에 불과했다.

1260년 쿠빌라이 칸이 대칸 자리에 오를 때, 제국의 재정은 이미 내전과 방만한 분봉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쿠빌라이는 중국식 제도를 대거 수용해 통합된 세금 체계를 재건하려 했다. 무슬림 출신 재무관 아흐마드 파나카티를 기용해 소금 전매와 각종 세율을 관장하게 했다. 아흐마드는 세율을 올리고, 광산 사업을 독점하고, 소금과 철을 국가 전매품으로 지정해 국고를 채웠다. 그리고 교초를 대대적으로 발행했다. 뽕나무 껍질로 만든 종이에 황제의 옥새를 찍어 유통시키는 지폐였다. 1260년 발행된 중통원보초(中統元寶鈔)는 은 1냥에 교초 2관의 비율로 태환을 보증했고, 위조범은 사형에 처했다.

대도(大都)를 방문한 마르코 폴로는 교초를 보고 황제가 연금술의 비밀을 완전히 터득한 것 같다고 썼다. 그 감탄은 절반만 옳았다. 상인들은 무거운 동전 대신 교초를 들고 실크로드를 오갔고, 무게 없는 돈이 처음으로 세계를 누볐다. 그러나 교초 발행량은 남송 정복을 앞두고 폭증하는 군비를 감당하면서 처음의 몇 배로 불어났다. 인쇄기를 돌리는 것이 세금을 걷는 것보다 빠르고, 농민의 저항을 덜 받았기 때문이었다. 1309년, 교초의 실질 가치는 은 대비 발행 당시의 약 12~13분의 1 수준1)으로 떨어져 있었다. 장부 위에서 숫자는 여전히 제자리였다. 하지만 그 숫자가 살 수 있는 것의 양은 조용히, 그러나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왕명의가 새벽마다 들여다보던 숫자들 — 지난해보다 줄어든 수확량, 오히려 늘어난 징수 목표치 — 이 하나씩 의미를 잃어가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쿠빌라이가 사망한 1294년 이후, 원나라 조정은 혼란스러운 황위 교체를 반복했다. 1307년부터 1333년까지 26년 사이에 황제가 아홉 번2) 바뀌는 극심한 혼란이 이어졌다. 새 황제가 옥좌에 오를 때마다 치러야 할 비용이 있었다. 왕공 귀족들에게 나눠주는 선물, 즉위 의식 비용, 충성을 사는 증여. 모두 제국의 장부에서 빠져나갔다. 충성을 한 번 샀다는 것은 다음에도 사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 빈자리는 어김없이 교초 인쇄기가 채웠다. 1310년, 3대 황제이자 7대 대칸인 무종(武宗)은 새 교초인 지대은초(至大銀鈔)를 발행하면서 기존 지원초(至元鈔) 다섯 관을 새것 한 관과 교환하라고 명했다. 상인들이 손에 쥔 종이의 가치가 하룻밤 사이에 5분의 1로 쪼그라들었다. 교초를 받고 쌀을 내놓던 시장 상인들이 하나둘 가게 문을 닫기 시작했다. 1351년 홍건적(紅巾賊)의 난이 번지기 시작하면서, 이듬해 조정은 또다시 지정교초(至正交鈔)를 발행하고 기존 교초와 5대 1로 교환하게 했다. 원나라 말기에 이르러 물가는 건국 초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치솟았다. 장부가 거짓말을 시작하자, 반란은 숫자보다 빨리 퍼졌다. 그 순간까지도 인쇄기는 멈추지 않았다.


제도를 설계한 사람들이 한계를 몰랐던 것이 아니었다. 야율초재는 교초 발행의 위험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고, 발행 상한을 스스로 제안한 사람이 그였다. 아흐마드도 소금 전매 이익이 어디로 흘러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왕명의 같은 말단 관리들도 맞지 않는 숫자가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지식이 아니었다.

몽골 귀족들이 분봉된 땅에서 독자적으로 세금을 걷는 권리는 칭기즈칸 이래의 관습이었고, 새 황제가 즉위할 때마다 귀족들에게 증여해야 하는 의무는 초원 유목 사회의 족장 문화였다. 세금 설계자들이 아무리 정밀한 장부를 만들어도, 그 장부 밖에서 이미 약속된 분배의 규모가 장부를 초과했다. 야율초재의 발행 상한은 번번이 무시됐고, 아흐마드가 채운 국고는 귀족들의 주머니로 흘러들어갔으며, 왕명의의 장부는 다시 쓰이고 또다시 쓰였다.

군사력으로 세운 제국은 군사력을 유지한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빚을 질 수밖에 없었다. 세계 최강의 군대로 유라시아를 정복한 제국이, 그 정복의 성공이 만들어낸 분배 약속들에 의해 서서히 잠식됐다. 야율초재가 붓을 꺼내던 날, 진짜 위기는 이미 장부 안에 새겨지고 있었다. 몽골이 세금을 몰랐기 때문에 무너진 것이 아니었다. 세금을 배웠기 때문에 무너졌다.


1368년, 주원장의 명나라 군대가 대도를 포위했을 때, 마지막 원나라 황제는 성문을 버리고 몽골 고원으로 퇴각했다. 왕명의가 새벽 관청에 앉아 맞지 않는 숫자를 들여다보던 날로부터 106년이 지난 뒤였다. 그날 그가 다시 집어 든 붓은 결국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씨앗까지 긁어가는 장부를 앞에 두고도 다음 해 들판이 다시 채워질 것이라 기대한 다루가치들이 있었고, 그들이 정말로 믿었는지 알면서도 눈을 감았는지는 알 수 없다. 손끝이 차가운 새벽에 촛불 앞에 앉아 맞지 않는 숫자를 바라보던 그 관리가, 다음에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다른 제국의 장부 위에도 앉아 있었다. 그곳에서는 숫자 대신 사람이 화폐였다.

주석

1) 해당 연구는 원 왕조의 교초 발행량과 물가 관계를 분석했으나 1309년 구체적 비율(12~13분의 1)은 제시하지 않으며, 논문 초록에는 인플레이션이 왕조 초기와 말기에 높았고 은본위제에서 명목화폐제도로 전환되었다는 수준의 기술만 포함되어 있어 해당 수치를 직접 뒷받침하지 못한다. (출처: The rise and fall of paper money in Yuan China, 1260–1368)

2) 제공된 발췌(사등인제 논문, 고려-몽골 관계, 황금 오르다 항목)에는 1307~1333년 황제 교체 횟수에 관한 서술이 전혀 없어 '9번 교체' 주장을 확인하거나 반박할 수 없다. (출처: Four-Class System of Administration During the Yua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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