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 고지서를 받는 날, 대부분의 사람은 숫자를 확인하고 한숨을 쉰다. 얼마를 내야 하는지, 언제까지 내야 하는지, 혹시 공제받을 항목은 없는지. 세금은 돈으로 내는 것, 현대인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전제다. 그런데 그 고지서에 금액 대신 아이의 이름이 적혀 있다면, 그리고 그것이 수백 년 동안 제국의 가장 강력한 재정 도구였다면 어떨까.
1450년대, 발칸 반도의 어느 기독교 농촌 마을. 오스만 관리들이 들이닥치는 날은 마을 전체가 굳어버리는 날이었다. 관리들은 8세에서 20세 사이의 남자아이들을 골랐다. 가장 총명하고 가장 체격이 좋은 아이들. 열네 살 야네스는 그날 아침 어머니가 구워준 빵 냄새를 기억했다. 곧 불어올 것 같던 차가운 바람을, 자신의 이름이 불리던 순간 마을 광장의 침묵을. 관리가 다가와 어깨에 손을 얹었을 때 아버지는 고개를 숙였다. 선발된 아이들은 어머니가 울고 아버지가 무릎을 꿇는 사이 이스탄불로 보내졌다.
데브시르메(devşirme). 이름 자체가 '수집'을 뜻했다. 제국은 사람을 수집해 군인을 만들고, 관료를 만들고, 때로는 재상을 만들었다. 오스만의 장부에는 금화 대신 머릿수가 적혔다. 그리고 그 장부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제국을 먹여 살렸다.
데브시르메를 체계화한 것은 14세기 말 무라드 1세였다1). 제국이 팽창하면서 튀르크 귀족 군사력만으로는 전선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고, 더 중요하게는 귀족들의 충성심을 신뢰할 수 없게 되었다. 해결책은 냉정했다. 술탄에게만 충성하는, 태생적으로 다른 연줄이 없는 인간을 만드는 것이었다. 징집된 아이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튀르크어를 배우고 예니체리(yeniçeri), 즉 '새 군단'이 되었다. 지금으로 치면 국가가 직접 운영하는 엘리트 인재 양성 시스템이었다. 다만 입학 자격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이 부과하는 것이었다.
3년에서 4년마다, 필요에 따라서는 매년, 관리들이 발칸과 아나톨리아의 기독교 농촌을 돌며 아이들을 징집했다. 기록에 따르면 한 번의 수집에 적게는 수백 명, 많게는 수천 명이 선발되었다. 이스탄불에 도착한 아이들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신체 조건과 지적 능력이 뛰어난 아이들은 궁정 학교 엔데룬(enderun)에 배치되어 최고 관료로 훈련받았다. 나머지는 예니체리 군단으로 편입되었다. 17세기 초, 예니체리 군단의 규모는 약 3만 5천 명에서 4만 명2) 사이로 불어나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재상직의 구성이었다. 15세기부터 17세기 사이, 오스만 제국의 대재상 중 다수가 데브시르메 출신이었다. 모국어도, 본래 이름도 잃은 사람에게 제국의 재정을 맡긴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당신이 그 마을에서 아이를 키우는 부모였다면, 아들을 내놓는 것이 저주인지 축복인지 어떻게 판단했을까.
이 인적 회계의 정점은 술레이만 1세(재위 1520~1566) 치하에서 완성되었다. 그의 재상 이브라힘 파샤는 당시 베네치아 공화국령이었던 에피루스 지방 파르가(Parga) 출신으로, 오스만-베네치아 전쟁 중 납치되어 노예가 된 뒤 궁정에 들어온 인물이었다. 궁정 학교를 거쳐 술레이만의 총애를 받은 그는 1523년 대재상이 되었고, 재정 개혁을 밀어붙여 지방 총독들의 세수 보고 의무를 강화했다. 제국의 장부가 정교해질수록 술탄의 통제력도 강해졌다. 이브라힘이 결국 술레이만의 명령으로 처형된 1536년, 그 자리를 채운 것도 또 다른 데브시르메 출신이었다. 권력의 순환은 멈추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구조가 멈춘 것은 언제였는가. 티마르(timar) 시스템은 그 물음에 다른 방향에서 답을 준다. 술탄이 군사 복무의 대가로 기병 시파히에게 부여하는 토지 수익권이었다. 봉급 대신 땅을 준 것이 아니라, 그 땅에서 세금을 걷을 권리를 준 것이다. 국고를 거치지 않으니 중앙 입장에서는 비용이 제로였다. 연간 수익 3,000 아크체(akçe) 이하의 소규모 할당지부터, 중간 지위 군관에게 주어지는 10만 아크체에 이르는 지아메트(zeamet), 최상위 직위에게는 그 이상의 하스(has)까지 규모가 달랐다. 16세기 초, 제국 전역의 티마르 보유 기병은 약 7만에서 9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들의 무장과 유지에 드는 비용을 국고가 아니라 토지 수익으로 충당했으니, 지금으로 치면 국방비의 상당 부분을 민간 위탁으로 처리한 셈이었다. 토지와 사람을 동시에 자원으로 분류하는 이중 회계, 그것이 오스만 재정의 두 기둥이었다.
오스만 제국의 인적·재정 회계가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17세기였다. 화약 무기의 발달로 기병 중심의 티마르 군사력이 구식이 되었고, 예니체리 군단은 점차 세습화되면서 원래의 기능을 잃어갔다. 처음에는 예니체리의 아들들이 군단에 들어오는 것이 허용되었고, 이후에는 거의 모든 입대가 내부 추천으로 이루어졌다. 데브시르메 징집은 17세기 중반 이후 사실상 중단되었다.
더 근본적인 균열은 화폐에 있었다. 16세기 후반, 아메리카에서 유입된 스페인 은화가 유럽 전체에 인플레이션을 일으켰고, 그 파도는 오스만에도 번졌다. 아크체의 은 함량은 1580년대에서 1640년대 사이 급격히 하락했다. 1620년대 초에는 금화 대비 환율이 불과 수년 사이 세 배 이상 폭락했고, 실질 가치는 3분의 2 이상 증발했다. 티마르 수익의 실질 가치가 급락하자 기병들은 군사 복무를 기피하거나 세금을 착복하는 유혹에 빠졌다. 지방 총독들은 중앙 보고를 조작했다. 지방마다 장부의 숫자가 달랐고, 실제 징수액과 보고액의 격차는 해마다 벌어졌다. 개혁안이 올라올 때마다 이스탄불의 궁정에서는 같은 일이 반복되었다. 검토하고, 논의하고, 서랍에 넣었다. 다음 해에 다시 꺼냈다. 다시 서랍에 넣었다. 그 서랍이 몇 번이나 열리고 닫히는 동안, 장부 안의 숫자들은 조용히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일부 발칸 기독교 공동체는 자발적으로 아들을 내놓으려 했다. 제국의 핵심부로 들어가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착취인가, 기회인가. 야흐야 베이처럼 대재상의 자리까지 오른 이들도 있었고, 예니체리 막사에서 이름도 없이 늙어간 이들도 있었다. 같은 제도 안에서 두 운명이 나란히 존재했다. 그 어느 쪽도 제도를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만이 공통점이었다.
야네스가 이스탄불로 끌려간 지 20년 후, 그는 야흐야 베이라는 이름을 가진 오스만 장교가 되었다. 튀르크어로 시를 썼고, 이슬람 기도를 드렸으며, 발칸의 어느 마을에서 보낸 첫 14년을 꿈에서만 떠올렸다. 그의 아들 둘은 예니체리 군단에 들어갔고, 세 번째 아들은 이스탄불의 상인이 되었다. 야흐야 베이는 데브시르메를 저주했을까, 아니면 자신을 그곳으로 데려온 운명에 감사했을까. 아마도 그는 그 질문 자체를 가끔씩만 허락했을 것이다. 적응한다는 것은 때로 질문을 잊는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가족들은 처음부터 그 질문 없이 아들을 내놓았다. 뇌물을 써서 아이를 징집 명단에 올린 부모들의 기록이 남아 있다. 제도가 단순한 폭력이 아니라 생존의 논리 안에 자리 잡았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이 제도는 외부의 강제와 내부의 동의가 뒤섞인 채 수백 년을 버텼다.
그러나 버팀의 조건은 제국의 군사력이었다. 티마르 기병이 현장에서 사라지고, 예니체리가 전투보다 이스탄불 정치에 더 깊이 개입하기 시작했을 때, 데브시르메도 함께 소멸했다. 장부에 머릿수가 적히던 자리에 공백이 생겼다. 무엇으로 채울 것인지, 아무도 답을 내놓지 못한 채로. 그 공백이 생겨나는 데 수십 년이 걸렸다. 채워지지 않은 채 굳는 데도 수십 년이 걸렸다. 공백이 선명해진 뒤에야 누군가 서랍을 열어 개혁안을 꺼냈지만, 그 서랍 안의 종이는 이미 낡아 있었다.
이스탄불로 떠나는 길에 야네스가 마지막으로 돌아본 것은 어머니의 얼굴이었을까, 아니면 빵 굽는 화덕의 연기였을까. 어느 쪽이든, 그 기억은 대재상의 서명이 담긴 장부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다. 장부는 숫자와 이름만 기록한다. 야네스에서 야흐야 베이로 바뀐 이름을, 징집 연도와 배치 부대를. 수십만 명의 야네스가 있었고, 그들 각자의 빵 냄새와 아버지의 고개 숙임이 있었지만, 오스만의 회계 문서는 그것을 담는 칸을 만들지 않았다. 제국은 사람을 화폐로 만들었지만, 그 화폐에 감정이 있다는 사실은 끝까지 기록하지 않았다. 다음 장에서 우리가 만날 제국은 사람 대신 은을 화폐로 썼다. 그 은도 결국 누군가의 손으로 캐낸 것이었지만, 장부는 그 손에 대해서도 침묵했다.
주석
1) 위키피디아 데브시르메 항목은 해당 제도가 문헌상 처음 언급된 것이 1438년이며 그 이전에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만 서술할 뿐, 무라드 1세를 체계화 주체로 명시하지 않아 귀속 시점에 이견이 존재한다. (출처: Wikipedia: Devshirme)
2) 위키피디아 예니체리 항목은 17세기에 오스만 상비군 규모가 '극적으로 증가'했다고 서술하나 구체적인 3만 5천~4만 명 수치는 제시하지 않아 정확한 병력 규모는 사료마다 편차가 있다. (출처: Wikipedia: Janissa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