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금은 계좌에서 빠져나간다. 날짜가 되면 숫자가 줄어들고, 영수증 한 장이 남는다. 그게 전부다. 그런데 그 방식이 당연해진 것은 역사 전체로 보면 눈 깜짝할 사이다. 세금 낼 날이 오면 관리가 빈 수레를 끌고 집 앞에 섰던 시절이 훨씬 길었다. 쌀 한 가마, 면포 두 필, 닷새치 노동력. 저울이 기준이고 창고가 목적지였으며, 물건마다 단위가 다르고 지방마다 거두는 품목이 달랐다. 비단과 쌀의 가치를 같은 장부에 올리려면 환산 기준이 필요했고, 그 기준은 관리마다 달랐다. 제국의 끝에서 끝까지 장부를 맞추는 일은 수백 년째 아무도 해내지 못한 숙제였다. 그 복잡함을 끌어안은 채 제국은 굴러갔다.
1368년 봄, 난징 황궁 동쪽 창고 구역. 회계 관리 왕무(王茂)가 새 장부를 펼쳤다. 잉크 냄새가 아직 가시지 않은 종이 위에 붓을 적셔 첫 항목을 내려썼다. 홍무제가 건국한 명나라의 첫 해 세입 기록이었다. 창고 안에는 면포 더미, 비단 꾸러미, 낟알 냄새를 풍기는 쌀 가마니가 천장 가까이까지 쌓여 있었다. 황제는 금속 화폐보다 곡물을 믿었고, 백성에게서 생산한 물건 그대로 세금을 거뒀다. 왕무는 면포와 쌀을 같은 줄에 올려야 할 때마다 붓을 멈췄다. 단위가 달랐고, 환산 기준도 없었다. 이 장부는 끝내 맞아떨어지지 않을 것이었다.
그로부터 두 세기가 흐른 뒤, 그 장부는 알아볼 수 없게 달라져 있었다. 곡물과 면포 대신 은(銀)이라는 글자가 모든 항목 앞에 붙었다. 왕무가 붓으로 적었던 면포의 단위, 쌀의 무게, 노동력의 날수는 사라지고 없었다. 왕무의 장부는 두 세기 만에 다른 언어가 되어 있었다.
왕무의 손자가 처음 봉급을 받던 날,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은 쌀도 면포도 아니었다. 보초(寶鈔)라고 불리는 종이였다. 홍무제가 건국 초기 설계한 이 지폐는 사적 동전 주조와 은 거래를 금지하고 정부 발행 종이만을 공식 통화로 인정하는 체제였다. 지금으로 치면 중앙은행이 화폐 발행을 독점하는 방식이었다. 손자는 그 종이를 받아 들고 앞뒤를 뒤집어 보았다. 무게도 냄새도 없었다.
문제는 황제가 보초를 너무 많이 찍어냈다는 것이다. 변방 군비, 궁궐 건설, 사신 접대 비용이 늘어날 때마다 조정은 세수를 올리는 대신 보초를 찍어 지출을 메웠다. 담보도 없고 상환 약속도 없는 발행이 수십 년간 이어지자 보초의 가치는 바닥을 뚫었다. 1430년대에 이르면 보초 1관의 실질 구매력은 발행 초기의 1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했다. 지금으로 치면 100만 원짜리 지폐가 수천 원이 된 것이다. 베이징 시장에서 쌀 한 말을 사려면 보초를 수레에 실어 가야 했다.
봉급으로 받은 보초는 받는 날부터 짐이었다. 쓸 수 없는 돈을 받아 쥔 관리들은 뒷거래를 통해 은으로 바꾸는 방법을 궁리했다. 상인들은 공식 통화를 공개적으로 무시하고 은으로만 가격을 불렀다. 세금을 은으로 받고 장부에만 보초로 기록하는 이중 장부가 만연했다. 궁궐 안에서는 보초가 법정 화폐였지만, 궁궐 담장 하나를 넘으면 그것은 종이 조각이었다. 황제가 신뢰한다고 선언해도, 백성이 함께 신뢰해주지는 않았다. 조정이 공식적으로 인정하든 하지 않든, 은은 이미 제국 안에서 실질 통화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16세기 초, 쑤저우의 비단 공방 장인 린씨는 아침마다 운하 위를 오가는 화물선을 창문 너머로 바라보며 하루를 시작했다. 배마다 비단과 도자기를 싣고 남쪽으로 내려갔고, 돌아올 때는 은괴를 싣고 왔다. 임금날 공방 주인이 그에게 은괴를 건넸다. 태평양을 건너 마닐라를 거쳐 온 은이었지만 린씨는 알지 못했다. 그 순환은 계절처럼 당연한 것이었다. 세금을 은으로 내는 일조편법(一條鞭法)이 도입된 것은 바로 그 시절이었다. 면포, 쌀, 노동력으로 잘게 나뉘어 있던 조세를 단일 통화로 통합하는 개혁이었다.
개혁을 주도한 수보(首輔) 장거정(張居正)은 각 지방의 현물 세금 장부를 모두 은 단위로 환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전까지 지방 관리가 비단 열 필을 일곱 필로 기록해도 은 단위로 비교할 기준이 없었다. 은으로 통합되자 조정은 처음으로 전국 세수를 한 줄의 숫자로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 장거정이 만리장성 수리 비용을 은으로 정산했을 때, 그의 장부는 과거 어느 시대보다 깔끔했다. 왕무가 붓을 멈추게 했던 그 문제, 단위가 다르고 환산 기준이 없던 그 문제가 마침내 해결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개혁은 명나라의 재정 전체를 하나의 금속에 완전히 묶어버렸다. 베이징에서 운남까지, 변방 요새에서 황실 내탕금까지, 은이 없으면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명나라 자체 광산 생산량은 연간 수십만 냥 수준으로 제국의 수요를 감당하지 못했다. 16세기 초·중반 스페인이 아메리카를 정복하고 주요 은광 지역을 장악하면서 전혀 예상치 못한 공급처가 열렸다. 멕시코 과나후아토와 페루 포토시의 광산에서 캐낸 은이 마닐라 갤리온 무역선을 타고 필리핀을 거쳐 중국으로 흘러들었다. 역사학자들의 추산에 따르면 1570년에서 1640년 사이 전 세계 은 생산량의 4분의 1에서 3분의 1 수준이1) 명나라로 유입되었다.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는 세계 어디서든 최고 가격을 받았고, 그 대금은 언제나 은이었다. 공방 창고에 은괴가 차오르면 그만이었다. 공방 주인도 묻지 않았고, 세관 관리도 따지지 않았다. 포토시 광산 수천 미터 갱도 안에서 원주민 노동자들이 캐낸 금속이 태평양을 건너 명나라 창고를 채우는 동안, 아무도 그 흐름이 멈추면 어떻게 되는지 생각하지 않았다. 린씨도 묻지 않았다. 묻기 어려운 시절이 아니었다. 그냥 묻지 않았다.
린씨가 처음 이상함을 느낀 것은 1620년대였다. 비단 값은 제자리인데 생활비가 오르고 있었다. 작년까지 먹던 것을 올해는 아껴야 했고, 공방에 새 직공을 들이는 일도 멈췄다. 운하를 오가는 화물선 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은괴를 싣고 오던 배들이 뜸해지면서 공방 금고도 조금씩 가벼워졌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린씨는 알 길이 없었다.
세계의 반대편에서 포토시 광산의 은맥이 가늘어지고 있었다. 스페인 제국의 재정 위기로 갤리온 무역이 크게 축소되었고, 에도 막부의 대외 교역 통제로 일본에서 흘러오던 은도 줄었다. 외부에서 공급되던 은의 줄기가 가늘어지자 명나라 안에서는 디플레이션이 찾아왔다. 은의 양이 줄어드니 은의 값이 올랐고, 같은 세금을 내기 위해 백성은 두 배, 세 배의 물건을 팔아야 했다. 농촌에서는 세금으로 낼 은을 구하지 못해 땅을 파는 소리가 이어졌고, 토지를 잃은 농민들이 도시로 밀려들었다. 일자리는 없었다.
1628년 섬서(陝西) 지방에서2) 농민들이 들고일어났다. 섬서 일대는 수년째 반복되는 한발과 메뚜기 피해로 농촌이 이미 무너지고 있었고, 은 부족이 세금 부담을 두 배로 만드는 동안 굶주림도 같은 속도로 깊어지고 있었다. 이자성(李自成)은 그 흐름 속에서 세력을 키워 제국의 심장부를 향해 진격해왔다. 베이징의 재무 관리들은 장부를 펼치면 수치를 읽을 수 있었다. 징수액이 줄어들고 있었고, 은의 흐름도 막히고 있었다. 일조편법을 되돌려 쌀과 면포로 세금을 거두는 것이 이론상 가능했지만, 수백만 농민과 관리가 새 체계에 적응해야 했고, 세관과 창고 인프라를 다시 쌓아야 했으며, 징세 인력을 처음부터 다시 훈련시켜야 했다. 그 전환을 감당할 시간과 자원이 없었다. 제국의 재정이 은에 최적화될수록, 은 없이 작동하는 능력은 상실되었다. 알면서도 바꿀 수 없었다.
왕무가 처음 장부를 펼치던 시대에는 쌀과 면포와 노동력이 각각의 언어로 창고를 채웠다. 그 복잡한 언어들이 제국을 다양한 방식으로 먹여 살렸다. 일조편법은 그 복잡함을 효율로 교환했다. 효율을 얻는 순간 다양성을 잃었고, 다양성을 잃은 제국은 단 하나의 실에 매달린 셈이었다. 수메르의 토양이 염분으로 망가지고 있다는 신호가 6만 5,000장의 점토판에 흩어져 있었지만 제국이 그것을 모아 읽지 못했듯이, 명나라의 장부들도 은 의존이 심화되는 속도를 각자의 자리에서만 기록했다. 보이는 데이터, 보이지 않는 구조. 개혁은 성공했다. 그리고 그 성공 때문에 무너졌다.
왕무의 후손이 1644년 경산 기슭에 있었는지 역사는 기록하지 않는다. 이자성 군이 베이징 성문을 두드릴 때 성벽을 지키던 병사 상당수는 수개월째 봉급을 받지 못한 상태였고, 숭정제가 경산(景山)의 나무에 목을 맸을 때 금고에 남은 은은 제국의 마지막 방어를 위해 쓰이기에도 턱없이 부족했다. 왕무가 봄날 아침 잉크 냄새를 맡으며 붓을 들었던 그 창고는 276년 뒤 다른 나라의 것이 되어 있었다. 새로 들어선 청나라는 명의 재정 기록을 넘겨받으며 같은 금속, 같은 교역로 위에 왕조를 세웠고, 린씨의 공방은 간판만 바뀐 채 다시 돌아갔다. 다른 장부에, 다른 이름으로, 같은 숫자가 다시 적히기 시작했다. 그 숫자가 어디서 오는지 다음 세대도 묻지 않았다. 창고가 차 있는 동안은, 아무도 묻지 않았다. 그리고 그 교역로가 열리기 전, 지구 반대편에는 금을 쌓아두고도 끝내 돈으로 쓰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주석
1) 스페인 제국과 중국의 관계를 분석한 연구에서 명나라의 은 수요가 1640년까지 높은 수익을 가능케 했다고 서술하나, 유입 비율의 구체적 수치(1/4~1/3)는 해당 발췌에서 직접 확인되지 않아 수치의 정확성에 논쟁의 여지가 있다. (출처: China and the Spanish Empire, 1996)
2) 위키피디아 'Late Ming peasant rebellions' 항목은 반란이 1628년에 시작되었으며 섬서뿐 아니라 산서·하남의 자연재해가 주요 원인임을 명시해, 단순한 '섬서 기근 반란'으로 서술할 경우 다지역 복합 원인을 누락하는 캐비엇이 존재한다. (출처: Wikipedia, Late Ming peasant rebell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