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트 향신료 코너에서 후추 한 통을 집어 들면, 손안에 잡히는 것은 가볍다. 그런데 그 가벼운 통이 진열대에 놓이기까지, 원가와 소비자 가격 사이에는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긴 거리가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500년 전 그 거리는 비교할 수 없이 멀었다. 그리고 그 거리를 처음으로 정확하게 계산한 나라가 있었다. 칼을 든 제국이 아니라, 갈대 펜을 든 서기의 나라였다.
1499년 8월 말~9월 초 어느 새벽, 리스본 항구의 돌바닥은 아직 안개에 젖어 있었다. 테주강 어귀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짠내와 생선 비늘 냄새를 몰고 왔고, 부두 창고 앞 밧줄 더미에서는 곰팡이 냄새가 스며 나왔다. 마누엘 페레이라는 두 손으로 양피지 한 장을 꼭 쥔 채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스물두 살의 그는 리스본 왕실 창고의 하급 서기였다. 손에 쥔 종이에는 바스쿠 다 가마의 함대가 인도에서 귀환하면 화물 목록을 빠짐없이 받아 적으라는 지시가 빼곡하게 쓰여 있었다. 그는 아직 자신이 무엇을 기록하게 될지 몰랐다.
배가 들어왔다. 갑판 위에 자루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다. 정박하는 순간, 강렬한 향기가 항구 전체를 덮쳤다. 후추였다. 계피였다. 정향이었다. 페레이라는 본능적으로 코를 막았다가 곧 손을 내렸다. 자루 수를 헤아리고, 중량을 받아 적고, 원산지를 기록하고, 선장의 서명을 받아야 했다. 갈대 펜이 양피지 위를 달렸다. 그가 적은 숫자는 단순한 화물 목록이 아니었다. 유럽 전체의 무역 질서를 뒤집을 첫 번째 청구서였다.
중세 유럽에서 후추 1킬로그램의 값은 숙련 노동자 나흘에서 닷새치 임금에 달했다. 계피는 금에 맞먹는다는 말이 나올 만큼 값비싸게 거래되었고, 정향은 귀금속에 비견될 정도의 값으로 팔렸다. 이 가격이 높은 이유는 향신료 자체가 희귀해서가 아니었다. 말루쿠 제도의 정향나무는 해마다 열매를 맺었고, 인도 말라바르 해안의 후추 덩굴은 손질 없이도 자랐다. 문제는 산지와 소비지 사이에 놓인 유통 체계였다. 누군가 이 체계를 바꾸기를 기다리는 동안, 유럽은 수백 년째 제값의 열 배에서 스무 배 이상을 지불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체계 안에서 이익을 나눠 가지는 나라들 가운데 누구도 먼저 사슬을 끊을 이유가 없었다.
산지에서 유럽 귀족의 식탁까지, 향신료는 수많은 손을 거쳤다. 말루쿠의 현지 상인이 자바 중개상에게 넘기면, 자바 상인이 인도 구자라트 항구로 운반했다. 거기서 무슬림 상인이 사들여 페르시아만이나 홍해를 통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까지 가져갔다. 이집트 맘루크 왕조는 통과세를 뜯었고, 베네치아 상인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사들여 유럽 전역에 분배하면서 다시 마진을 얹었다. 산지에서 1두카토에 팔린 후추가 베네치아와 리스본에서는 14~18두카토, 영국 같은1) 최종 소비지에서는 20두카토를 넘었다. 당신이 그 유통 사슬의 한 고리였다면, 이 사슬을 끊으려는 자가 나타났을 때 그것을 지키려 했을까, 아니면 그 안에서 더 유리한 자리를 찾았을까.
포르투갈 왕실은 이 체계를 이해했다. 전쟁으로 유통 경로를 끊을 수는 없었지만, 우회할 수는 있었다.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인도로 가는 항로를 개척하면, 중간 상인 없이 산지에서 직접 살 수 있었다. 1498년 다 가마가 인도 캘리컷 항구에 닿았을 때, 포르투갈이 구입한 후추 가격은 베네치아에서 팔리던 가격의 10분의 1에서 20분의 1 수준이었다. 경쟁력은 전쟁이 아니라 항로에서 나왔다. 이 나라는 칼로 무역로를 차지한 것이 아니라, 더 짧은 계산서를 들고 나타났다. 그 계산서의 맨 윗줄에는 페레이라가 그날 새벽 부두에서 처음으로 받아 적은 숫자가 있었다.
1500년, 포르투갈 왕 마누엘 1세는 인도양 무역을 관리할 조직을 세웠다. 카사 다 인디아, 즉 인도청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국영 무역공사와 관세청을 합쳐놓은 기구에 해당하지만, 실제로는 해군 함대 편성과 해외 교역 거점 관리까지 담당하는 제국 무역 총괄 기관이었다. 모든 향신료는 이 창구를 통해서만 수입되었고, 민간 상인의 독자 거래는 금지되었다. 서기장으로 승진한 페레이라는 매달 들어오는 화물을 기록하고, 세금을 산정하고, 왕실 금고로 보낼 수익을 계산했다. 1501년부터 1510년 사이 포르투갈 왕실 수입의 절반 이상이 향신료 무역에서 나왔고, 리스본은 한때 베네치아를 제치고 유럽 최대의 향신료 집산지가 되었다. 독점이 이기고 있었다. 숫자가 칼보다 강했다.
그러나 페레이라는 수입란 옆에 나란히 놓인 지출란도 함께 들여다보고 있었다. 1510년대에 들어서면서 포르투갈은 말라카, 고아, 호르무즈를 연달아 장악했다. 영역은 빠르게 넓어졌고, 넓어진 영역마다 요새가 필요했으며, 요새마다 수비대가 주둔해야 했다. 고아 총독은 리스본에 지원금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고, 말라카 사령관은 선박 수리 비용을 청구했으며, 호르무즈 주둔군은 식량이 떨어진다고 보고했다. 왕실 창고에 쌓이던 향신료 이익은 제국 각지로 흩어지는 군비에 빠르게 녹아들었다. 한(漢)나라가 실크로드를 통해 세금을 거두면서도 변경 방어 비용에 삼켜졌던 것처럼, 포르투갈도 같은 함정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이 무렵 인도양 항로를 지키기 위한 함선 유지 비용은 왕실 세입의 상당 부분을 삼키고 있었다. 독점을 지키는 비용이 독점의 이익을 뒤쫓고 있었다.
리스본에서 인도까지는 편도 여섯 달이 걸렸다. 왕실이 현지 상황을 파악하고 지시를 내리면, 그 지시가 도착할 때쯤에는 상황이 이미 바뀌어 있었다. 카사 다 인디아의 장부는 언제나 반년 전의 현실을 담고 있었다. 나라는 숫자로 제국을 경영했지만, 숫자가 따라잡지 못하는 속도로 제국은 커지고 있었다. 어느 해 봄, 신임 서기가 전임자의 대장을 넘기다 손을 멈춘 적이 있었다. 지출 합계가 수입 합계를 처음으로 앞지른 달이었다. 그는 상관에게 보고서를 올렸다. 보고서는 왕궁으로 전달되었고, 왕궁에서는 그해 새로 들어온 화물 목록을 답장 대신 보내왔다. 후추가 많이 왔다. 정향도 풍작이었다. 장부가 보내는 경고는 듣기 불편한 소음이 되고 있었다. 다음 자루가 들어오면 지출란에 또 한 줄이 새로 생길 것이었다.
요새 하나를 유지하는 데 드는 비용은 향신료 자루 수백 개로 충당해야 했고, 자루가 늘어날수록 지켜야 할 항구도 늘어났다. 수입이 늘어난 만큼 비용도 늘어났지만, 비용의 속도가 언제나 한 발 앞섰다. 1580년, 포르투갈이 스페인에 합병될 당시 왕실 부채는 연간 세입의 두 배에 달해 있었다. 향신료 무역은 멈추지 않았다. 이익도 계속 들어왔다. 그런데 나라는 파산했다. 이익이 있어서 망한 것이었다.
이 역설의 이치는 단순하다. 이익이 클수록 더 넓은 영역을 차지하려 했고, 더 넓은 영역을 차지할수록 그것을 지키는 비용이 더 빠르게 불어났다. 독점을 지키기 위한 팽창이 독점의 이익을 잠식하는 흐름, 그것이 포르투갈이 발을 들여놓은 함정이었다. 이 함정에서 빠져나오려면 이미 손에 쥔 이익을 스스로 내려놓아야 했다. 그런데 눈앞에 자루가 들어오는 동안, 그 결정을 내린 왕도, 어느 귀족도, 어느 장군도 없었다.
장부를 가장 꼼꼼하게 읽은 서기들도 그 결정을 내릴 자리에 없었다. 숫자를 아는 것과 숫자대로 움직이는 것 사이에는, 왕궁 만찬의 후추 냄새만큼이나 짙은 거리가 있었다. 몰라서 못 멈춘 것이 아니었다. 알면서도 이 흐름 안에서 멈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것은 포르투갈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제국이 커질수록 장부는 두꺼워지고, 장부가 두꺼워질수록 장부 안의 숫자와 바다를 오가는 배들 사이의 거리도 함께 멀어진다. 경고는 기록되었다. 읽히지 않았을 뿐이다.
페레이라는 그날 새벽 부두에서 처음 맡았던 냄새를 오래도록 잊지 못했다. 후추와 정향의 강렬하고 자극적인 향기, 그리고 그 냄새 속에서 갈대 펜으로 숫자를 받아 적던 차갑고 축축한 손의 감각. 그는 훗날 수입란이 지출란을 처음으로 밑돌던 날, 그 숫자를 손을 떨지 않고 잉크로 써넣었다. 창밖 테주강 위로 오늘도 새로운 배가 들어오고 있었다. 이번에는 향신료가 아니었다. 대서양 저편에서 건너오는 것은 은이었다. 왕궁 사람들은 은이 충분하면 장부의 구멍을 메울 수 있다고, 오래 버티다 보면 상황이 반드시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페레이라는 새 자루의 중량을 받아 적으며 지출란 아래에 새 줄을 그었다. 구멍은 채워지는 것과 함께 자란다. 더 많은 은을 가진 나라가 그것을 가장 먼저 배우게 된다. 손이 먼저 알고 있었다.
주석
1) 오리어리의 연구는 베네치아 향신료 시장이 이베리아·북유럽과 이미 통합되어 있었다는 레인 가설을 재검토하며, 유럽 내 후추 가격 수준과 지역 간 격차에 대한 논쟁이 실재함을 보여준다. (출처: Did Vasco da Gama Matter for European Markets? Testing Frederick Lane's Hypotheses Fifty Years Later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