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회계 23화 — 비단길의 마지막 주인

앱 하나를 깔면 그 순간부터 수수료가 붙는다. 배달 앱은 식당 매출의 일부를 가져가고, 플랫폼은 판매자에게 입점료를 받고, 카드사는 결제마다 가맹점 수수료를 뗀다. 팔리는 물건은 판매자의 것이지만, 팔리는 경로는 플랫폼의 것이다. 길을 만든 자가 통행료를 매기는 구조는 지금도 바뀌지 않았다. 400년 전, 그 원리로 제국을 설계한 나라가 있었다.

1617년 가을, 이스파한 바자르의 뒷골목. 바흐람은 새벽 네 시에 창고 문을 열었다. 촛불 하나 없이 문을 여는 것은 규칙이 아니라 습관이었다. 관리가 오기 전에 물량을 확인해야 했다. 길란에서 내려온 생사 꾸러미들이 바닥을 채우고 있었다. 손가락으로 섬유를 잡아당기면 끊기지 않았다. 좋은 것이었다. 바흐람은 가격을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한 묶음에 은화 셋. 뉴 줄파의 아르메니아 상인들이 유럽으로 내보내면 열두 개도 더 받는다고 했다. 그 차액은 어디로 갔는가. 그는 답을 알았다. 하지만 묻지 않았다.

그날 오후, 황실 대리인이 창고 앞에 나타났다. 허리띠에 인장이 달려 있었다.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오늘부터 생사의 수출에는 묶음당 12토만의 관세가 붙는다고 적혀 있었다. 바흐람은 숫자를 다시 읽었다. 어제까지 그는 개인 자격으로 팔 수 있었다. 오늘부터는 황실 대리인을 통하거나, 규정 관세를 내거나. 두 길뿐이었다. 사실상 같은 말이었다. 창고 안에서 바흐람이 멈췄다. 생사 냄새가 짚과 습기를 함께 끌고 왔다. 그는 장부를 펼치지 않았다. 대신 손바닥으로 꾸러미 하나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비단길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누군가가 길을 만들고, 다른 누군가가 통행료를 매긴다.


아바스 1세가 이스파한으로 수도를 옮긴 건 1598년이었다. 타브리즈는 오스만 국경에 너무 가까웠다. 카즈빈은 어중간했다. 이스파한은 고원의 한복판, 사방으로 길이 열리는 교차점이었다. 샤는 수도를 택한 것이 아니라 무역로의 중심을 골랐다. 도시의 중심에는 왕의 광장 나크시 에 자한이 놓였고, 사방으로 뻗은 시장 골목마다 생사와 양탄자와 도기가 쌓였다. 런던 상인들이 이 도시를 두고 세계의 절반이라 부른 것은 건물을 보고서가 아니었다. 어느 방향으로 돌아도 돈의 흐름이 이 도시를 통과했기 때문이었다.

아바스는 즉위 직후 첫 번째 개혁으로 징세권을 지방 부족장인 키질바시에게서 빼앗아 황실에 귀속시켰다. 세금이 중앙으로 집중되자 그것으로 군대를 개편하고, 군대로 영토를 넓히고, 영토로 무역로를 확보했다. 그전까지 사파비는 키질바시 족장들의 느슨한 연합에 불과했고, 족장들이 각자 지역에서 세금을 걷어 중앙에 일부를 보냈으니 황실이 실제로 손에 쥔 것이 얼마인지 아무도 몰랐다. 아바스는 그 판을 뒤집었다. 지금으로 치면 국세청이 없던 나라에 국세청을 만들고, 세무조사관을 직접 파견한 셈이었다. 키질바시의 반발은 거셌지만 아바스는 밀어붙였고, 새로 장악한 세수로 노예 병사 군단을 키워 그 반발을 눌렀다. 풍요가 권력을 낳는 방식은 22장의 은광 이야기와 다르지 않았다. 다만 이번에는 은 대신 비단이 그 자리에 있었다.

비단의 생산지는 카스피해 연안의 길란과 마잔다란이었다. 아바스는 이 두 지역을 황실 직할령으로 전환했다. 생산지를 직접 쥐고, 수출에는 관세를 물리고, 1617년에는 사실상의 국가 독점 체제를 완성했다. 유럽 상인들은 이 비단을 사려면 황실 대리인을 거쳐야 했다. 동쪽과 서쪽을 잇는 길 위에서 사파비는 단순한 통과국이 아니라 게이트키퍼가 됐다. 오스만이 지중해 항로를 장악하고 있던 시대에 이란을 관통하는 육로는 유럽이 동방 비단을 얻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통로였고, 아바스는 그 사실을 정확히 알았다. 이란산 생사는 중국산이 포르투갈에 묶여 있는 틈을 타 유럽 시장에서 최고의 대체재가 됐다. 유럽 교회 예복의 비단이 이스파한에서 나왔다. 바흐람이 새벽 창고에서 혼자 계산하던 그 차액이, 사실은 제국의 재정 설계도였던 것이다.

독점이 완성되기 13년 전, 아바스는 이미 다른 계산을 마쳐놓았다. 1604년, 구 줄파의 아르메니아 주민들을 강제로 이스파한 남쪽으로 이주시키고 그곳을 뉴 줄파라 불렀다. 이 이주는 폭력적이었다. 수천 명이 이동 중에 죽었고, 살아남은 자들이 도착한 뉴 줄파는 황무지였다. 그러나 수 세대에 걸쳐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상단을 운영해온 이 가문들이 자리를 잡자 뉴 줄파는 바자르와 교회와 창고가 함께 들어선 자치 도시가 됐다. 아바스가 원한 것은 이들의 네트워크였다. 주소록과 신용과 여러 언어. 사파비 비단은 이 통로를 통해 베네치아와 암스테르담까지 흘러들어갔다. 당시 이스파한의 인구는 50만 명 안팎으로 추산되며 런던과 어깨를 겨루는 세계 최대 도시 중 하나였고, 그 안에는 영국·네덜란드·포르투갈 상인들의 숙소와 동인도회사 창고가 함께 들어서 있었다. 뉴 줄파에 세워진 성당의 종이 울릴 때, 이스파한의 모스크에서도 예배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바스는 신앙보다 수익이 먼저였다. 이 체제의 엔진은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엔진에는 처음부터 설계에 없던 부품이 있었다. 바로 아바스 이후였다.

1629년 아바스가 죽자 후계자들은 하렘에 머물렀다. 샤 사피라는 왕명으로 즉위한 황제는 술과 아편에 탐닉하며 정무를 재상에게 맡겼다. 황실 대리인들은 관세를 걷되 기록하지 않거나, 기록하되 올리지 않거나, 올리되 액수를 줄였다. 지방 관리들은 임명직이어서 관할 지역에 대한 애착이 없었다. 세습 토후는 땅이 망하면 제 수입이 줄어드니 나름대로 관리했지만, 임명직 관리는 임기가 끝나면 떠날 사람이었다. 세금을 많이 뜯어낼수록 개인 수입이 늘었다.

길란의 잠실에서 일하던 직공들은 이중, 삼중의 명목으로 돈을 내야 했다. 수확세, 운반세, 감독 수수료. 이름이 달라도 손에 쥐는 것은 같았다. 누에를 키우는 농가에서도 관리의 손이 뻗쳤다. 봄에 뽕잎을 내다 팔면 가을에 세금 고지서가 왔고, 가을에 고지서를 내면 이듬해 봄에 이자가 붙었다. 비단 생산량은 줄어들기 시작했고 품질도 떨어졌다. 유럽 상인들은 차차 인도와 중국 쪽으로 눈을 돌렸다. 황실이 독점을 쥔 채로 품질을 관리하지 못하자 독점은 세수의 보증이 아니라 짐이 됐다. 길을 지키지 못하는 자가 통행료만 고집하면 상인들은 다른 길을 찾는다.

그리고 그 봄, 길란의 직공 하나가 세금 고지서를 받아들고 한참 들여다보다 종이를 내려놓았을 때, 이스파한의 장부에는 그 일이 기록되지 않았다.


비단이 줄자 돈이 줄었고, 돈이 줄자 변경의 병사들이 급료를 기다렸다. 1722년, 표트르 대제가 카스피해 연안으로 진격해 다게스탄을 점령하기 시작했고, 이듬해인 1723년에는 쉬르반까지1) 차지했다. 길란의 생사가 유럽으로 나가려면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길목이었다. 황실은 항의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원정군을 꾸리려면 돈이 필요했고, 돈을 만들려면 비단이 필요했고, 비단을 지키려면 원정군이 필요했다. 고리가 끊어진 자리에 러시아가 들어왔다.

같은 해, 호타키 왕조의 아프간 군대가 이스파한을 포위했다. 포위 기간에 시민 8만 명이 굶어 죽었다. 황제 술탄 후사인은 성문을 열고 나가 항복했고, 왕관과 칼·인장 등 왕실 표시물을 마흐무드 호타키에게 넘기며 퇴위를 선언했다. 그 순서를 보면 칼이 먼저가 아니었다. 관세 수입이 먼저 떨어졌고, 군 급료가 다음으로 밀렸으며, 성벽은 마지막에 열렸다.

그리고 그 앞에는 더 긴 이야기가 있었다. 직공이 봄마다 뽕잎을 팔고 세금을 갚던 그 반복, 관리가 관세를 걷고 기록을 줄이던 그 일상이 수십 년 쌓인 결과였다.

아바스 이후의 황제들이 무능했기 때문에 제국이 무너진 것이 아니다. 무능한 황제를 버텨낼 재정 기반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해야 더 정확하다. 중앙 집권은 강했지만 중앙이 기능을 멈추면 전체가 함께 멈추는 체제였다. 비단 독점은 왕의 손이 느슨해지는 순간 그 이권을 쥔 관리들의 사유 재산으로 조용히 분해됐다. 지방 관리의 탐욕이 생산 기반을 갉아먹어도 황실이 알아채는 시스템이 없었다. 애초에 막을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알면서도 막을 수 없었다.


바흐람이 창고를 마지막으로 닫은 날이 언제인지는 기록에 없다. 이스파한의 바자르는 아프간 군대가 성문을 부수기 전에 이미 조용해졌다. 유럽 상인들이 먼저 떠났고, 뉴 줄파의 아르메니아 상인들은 더 일찍 짐을 쌌다. 강제로 이주당해 황무지에 도시를 세운 사람들이 가장 먼저 위험을 알아챘다. 바흐람이 열쇠를 허리춤에 찔러넣었을 때, 그 자물쇠가 다시 열렸는지는 알 수 없다. 생사 냄새가 나던 그 창고에 이제 다른 무언가가 들어와 있을 것이다. 비단길의 마지막 주인이 남긴 장부에는 아직 채워지지 않은 페이지가 많았다. 빈 줄들 위로, 은을 찾는 자들의 발소리가 이미 가까워지고 있었다.

주석

1) 위키피디아 러시아-페르시아 전쟁(1722–1723) 항목에 따르면 러시아는 다게스탄 남부(데르벤트)와 바쿠를 점령했으며, 쉬르반은 1723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으로 할양된 여러 주 중 하나로 기술되어 있어 '다게스탄 점령 후 이듬해 쉬르반 차지'라는 순차적 서술과 정확히 일치하지 않는다. (출처: Wikipedia, Russo-Persian War (1722–1723))

함께 읽으면 좋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