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아파트를 살 때 은행은 먼저 당신의 소득을 묻는다. 연봉이 얼마냐고, 빚은 없느냐고. 담보 가치는 그다음이다. 아무리 비싼 집이라도 거기서 돈이 흘러나오지 않으면 은행은 대출을 끊는다. 16세기 유럽에서 가장 정확하게 이 원리를 이해하고 있던 사람은 황제가 아니었다. 은행가였다.
1519년 6월, 아우크스부르크의 야코프 푸거는 사무실 창가 책상에 앉아 있었다. 벽면을 채운 서랍장 각 칸에는 리스본, 베네치아, 안트베르펜, 나폴리 등 유럽 주요 도시 이름이 적혀 있었고, 칸마다 당좌 계정과 채권 원부가 가득했다. 그는 방금 역사에서 가장 비싼 선거를 끝낸 참이었다. 신성 로마 황제 자리를 두고 벌어진 7인 선제후의 표결에서 카를 5세를 당선시키기 위해 총 약 85만 플로린이 지출됐으며, 그 중 푸거 가문이 54만 3천 플로린을 부담했다. 오늘날 환산하면 수백억 원 규모다.
1523년, 제국의회에서 푸거 가문의 독점을 제한하려는 논의가 불거지자 야코프 푸거가 카를 5세에게 보낸 편지의 핵심 문장은 이랬다. "폐하께서 저의 도움 없이는 황관을 얻을 수 없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황제를 사는 것이 그에게는 사업이었고, 황제는 그것이 빚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서명했다.
카를 5세는 이제 세계에서 가장 넓은 제국의 주인이었다. 스페인과 신대륙, 이탈리아 남부와 네덜란드, 보헤미아와 오스트리아. 그러나 빈의 재무 책임자들이 진짜 지도를 펼쳤을 때, 황제의 영토는 한 덩어리가 아니었다. 각 영지는 각자의 의회를 가지고 있었고, 각자의 귀족이 세금을 승인하고 있었으며, 각자의 규칙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황제의 재무부는 황제의 영지에서 마음대로 세금을 걷을 권한이 없었다. 제국은 넓었다. 황실 금고는 비었다.
1521년 봄, 보헤미아의 세무 관리 한스 크라머는 프라하 성 안에서 문서 더미를 뒤지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황제 카를 5세 명의의 긴급 세금 청구서가 놓여 있었다. 오스만 제국이 헝가리를 압박하고 있었고, 황제는 방어선을 유지하기 위해 보헤미아 의회에 특별세를 요청했다.
크라머는 숫자를 계산했다. 황제가 요구한 금액은 보헤미아 연간 세수의 절반이었다. 그는 각 영주의 저택으로 전령을 보냈고, 결과를 기다렸다. 의회는 금액을 삼분의 일로 삭감했다. 귀족과 성직자는 개인 면세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세금을 내는 것은 농민과 소상인이었는데, 이들은 황제의 세리가 아니라 영주의 세리에게 납부했다. 황제에게 직접 흘러 들어오는 세금은 제국 영토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작았다. 크라머는 삭감된 금액을 적으면서 잠시 펜을 멈췄다. 원래 숫자를 그대로 올릴 수 있을까. 생각은 일초도 이어지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그는 삭감된 숫자를 옮겨 적고 봉투를 닫았다.
황실 재무부가 집계한 1540년대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의 실제 직접 세수는 연간 약 100만 플로린이었다. 같은 시기 스페인 카스티야 세수가 200만 두카트를 넘었고, 신대륙에서 오는 은이 별도로 수백만 규모였다. 영토의 크기에 비하면 형편없이 가난한 황실이었다. 카를의 동생 페르디난트 1세가 오스트리아·헝가리·보헤미아를 물려받았을 때 그가 상속받은 것은 땅이 아니라 의회들의 거부권이었고, 황제가 의회를 거치지 않고 수입을 뽑을 수 있는 직접 관할지 카메랄구트는 해마다 담보로 떼어주면서 점점 줄어들었다. 영토가 늘어날수록 황실이 직접 손댈 수 있는 자산은 오히려 줄었다. 크라머의 후임들도 같은 자리에 앉아 같은 동작을 반복했고, 달라진 것은 숫자의 크기뿐이었다.
그 숫자의 빈자리를 채울 사람이 누구인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푸거 가문은 이 구조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다. 황제가 세금을 충분히 걷지 못할 때마다 그들은 대출을 제공했고, 담보로 광산 채굴권이나 미래 세수를 받았다. 막시밀리안 1세는 1496년에 14만 8천 플로린, 1507년에 20만 플로린, 1508년에 13만 플로린을 각각 빌렸다. 카를 5세는 더 많이 빌렸다. 이자율은 12~14퍼센트였는데, 당시 우량 상인에게 적용하던 이자의 두 배에 가까운 수준이었다. 담보는 항상 미래 수익이었다. 광산, 세금, 관세. 미래 수익을 담보로 잡으면 황실의 미래 수입은 줄어들었고, 그러면 다시 대출이 필요했다. 앞 챕터에서 스페인이 신대륙의 은으로 부도를 연기했던 것처럼, 합스부르크는 미래 자산을 담보로 현재의 위기를 넘겼다. 둘 다 같은 구조였고, 둘 다 같은 방향으로 달렸다. 1557년 펠리페 2세가 처음 국가 부도를 선언했을 때 푸거 가문이 스페인에 빌려준 돈만 290만 길더가 넘었다. 황제를 살 때 담보를 요구했지만, 그 담보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도 결국 황제의 세금 징수 능력이었다. 푸거의 서랍장에는 황제 이름이 적힌 칸도 있었다. 그 칸 안의 숫자는 해마다 커졌다.
1618년, 보헤미아 귀족들이 황제 사절을 프라하 성 창밖으로 내던졌다. 30년 전쟁이 시작됐다. 크라머가 앉아 있던 그 성, 그가 삭감된 청구서를 봉투에 넣어 올리던 그 구조가 마침내 물리적 폭발로 분출했다. 전쟁은 30년을 끌었고 독일 지역 인구의 최소 3분의 11), 학계 추산에 따라서는 그 이상이 전쟁과 기아, 역병으로 사라졌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됐을 때 황제는 명목상의 지위를 지켰지만 그것뿐이었다. 조약은 약 300개에 달하는 제국 구성 제후 각자가 대외 동맹을 체결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다만 황제와 제국의 이익에 반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였고, 실질적으로 황실의 통제력은 크게 줄어들었다. 황실은 전쟁에서 살아남았지만, 살아남음으로써 더 약해졌다. 같은 시기 영국은 1694년 영란 은행을 설립해 정부 채권을 8퍼센트 이자로 발행하기 시작했다. 합스부르크의 대출 이자는 여전히 20퍼센트 이상을 오르내렸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황실은 빈 궁정의 유대인 금융업자들에게 손을 벌렸다. 사무엘 오펜하이머는 혼자 황실 연간 대출의 절반 가까이를 공급했는데, 지금으로 치면 국가 재정의 절반을 단 한 명의 민간 은행가가 떠받치는 셈이었다. 1703년 그의 기업이 파산하자 황실 재정도 함께 흔들렸다. 8퍼센트와 20퍼센트의 격차가 결국 두 제국의 운명을 갈랐다.
1748년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이 끝나자마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개혁에 착수했다. 귀족과 성직자에게도 세금을 부과하는 법안을 밀어붙였고, 그 결과 오스트리아 직접 세수는 1750년대 연간 약 2천만 플로린에서 1780년에는 5천만 플로린으로 증가했다. 성공처럼 보였다. 그러나 같은 시기 영국의 세수는 이미 그 배를 넘었다. 아들 요제프 2세는 더 급격하게 밀어붙였다. 귀족의 면세를 전면 폐지하고 농노제를 철폐하며 수도원 재산을 몰수해 국고에 편입했다. 재위 10년 동안 오스트리아에 6천 건 이상의 행정 법령이 쏟아졌다. 그러나 헝가리 귀족들은 반란으로 응답했고, 벨기에에서는 봉기가 일어났으며, 보헤미아 영주들은 집단 청원서를 빈으로 보냈다. 요제프는 죽기 직전 자신의 개혁 대부분을 스스로 철회했다.
합스부르크의 영토는 정복이 아니라 혼인으로 조각조각 이어 붙인 땅이었다. 각 조각은 자신이 합류하기 이전의 법과 의회와 귀족 특권을 그대로 유지한 채 황실에 편입됐다. 통합된 세금 체계가 없었고, 단일한 법원도 없었다. 황제의 명령은 각 영방 의회를 통과해야 효력을 가졌으며, 그 의회들은 항상 세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영토가 넓어질수록 거부권을 가진 귀족의 수도 늘어났다. 황제는 알고 있었다. 알기 때문에 움직일 수 없었다. 개혁이 실패한 것이 아니었다. 구조가 개혁을 삼켰다.
요제프가 법령을 철회했을 때 빈의 재무 관리들은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숫자로 알고 있었다. 개혁이 통과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통과되더라도 실제 세수는 기대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황제의 의지가 문제가 아니었다. 의지가 아무리 강해도 닿을 수 없는 곳에 세금이 있었다.
1519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야코프 푸거가 54만 3천 플로린을 내밀었을 때, 그는 황제에게 돈을 빌려주는 것이 아니었다. 황제가 다시 올 수밖에 없는 상황에 돈을 빌려주고 있었다. 세금은 귀족을 거칠 때마다 줄었고, 황실에 닿을 때는 항상 처음보다 작은 숫자였다. 그 간격을 메우는 방법은 대출뿐이었고, 대출을 갚으면 다음 위기가 왔으며, 다음 위기가 오면 다시 대출이 필요했다. 크라머가 삭감된 청구서 앞에서 펜을 멈춘 것과 약 270년 뒤 요제프가 법령을 철회한 것은 같은 이유였다. 전쟁도, 조약도, 개혁도 그 이유를 바꾸지 못했다.
황실 금고는 비어 있었고, 그 빈자리는 항상 누군가의 대출로 채워졌다. 막시밀리안이 빌렸고, 카를이 빌렸고, 페르디난트가 빌렸으며, 30년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도 황실은 빌렸다. 푸거 가문이 파산한 뒤에는 오펜하이머가 그 자리를 채웠다. 대출자는 바뀌었지만 황실 금고의 빈자리는 바뀌지 않았다. 푸거는 그것을 알았다. 그래서 돈을 빌려줬다. 황제가 아니라 황제의 빈 금고가 안전한 담보였기 때문이다.
1519년 10월, 야코프 푸거는 선거 자금 정산을 마치고 서랍을 닫았다. 리스본 서랍, 나폴리 서랍, 그리고 새로 이름표를 붙여야 할 서랍 하나. 그는 황제를 만들었고, 그 황제는 300년 넘게 이어질 제국의 첫 장부를 떠안았다. 푸거 가문은 합스부르크가 빚을 갚지 않자 결국 자신들도 파산했다. 황제가 의회를 거치지 않고 직접 세금을 걷는 단일한 체계. 합스부르크가 끝내 완성하지 못한 그것을, 다음 장의 무굴 제국은 쇠사슬 줄 하나로 시작했다. 푸거의 서랍장 안에서 아직 열리지 않은 서랍이 하나 있었다.
주석
1) Wikipedia 발췌는 30년 전쟁으로 독일 일부 지역에서 인구가 50% 이상 감소한 사례를 보고하며, 전체 사망자를 450만~800만 명 사이로 추산해 '최소 3분의 1'이라는 단일 하한선과 수치 범위가 일치하지 않는다. (출처: Thirty Years' War,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