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회계 25화 — 세계의 4분의 1

공시지가 고지서가 날아오는 날, 대부분의 사람은 숫자만 확인한다. 얼마를 내야 하는지. 그 숫자가 어떻게 산출됐는지, 누가 어느 날 아침 당신의 땅에 등급을 매겼는지는 묻지 않는다. 묻지 않아도 통장에서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숫자, 즉 땅을 재고 수확을 평균해 세금을 정하는 방식이 처음 만들어진 날이 있다. 칼이 아니라 쇠사슬 줄로, 폭력이 아니라 기록으로 세금을 설계한 사람. 그가 만든 숫자는 인도를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땅으로 만들었고, 그 숫자를 물려받은 손이 바뀌는 순간 같은 숫자가 인도를 가장 빠르게 망가뜨리는 도구가 됐다.

1590년 봄, 아그라 근교 야무나 강변 들판에서 라힘은 밭 경계를 걷고 있었다. 황제의 측량관이 오늘 마을에 온다는 소식이 전날 저녁에 들어왔다. 측량관은 쇠사슬 줄로 밭의 가로와 세로를 재고, 지난 10년치 수확 기록을 꺼내 올해 세금을 확정할 것이었다. 라힘의 손바닥에는 아직 새벽 흙의 냉기가 남아 있었다. 그의 아버지 대에는 자민다르, 즉 지방 영주가 눈짐작으로 세금을 정했다. 영주의 기분이 좋으면 적게, 나쁘면 많게. 지금은 달랐다. 측량관의 쇠사슬이 닿은 면적과 장부에 기록된 수확량이 숫자를 만들었고, 그 숫자가 루피의 액수를 결정했다. 라힘은 측량관이 경계를 잘못 읽을까봐 밭 가장자리의 돌을 다시 줄 맞춰 세웠다. 숫자가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그 믿음이 얼마나 오래 유효한지는, 아직 아무도 그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악바르가 1556년 열세 살에 제위에 올랐을 때 무굴은 북인도의 불안한 왕조였다. 조부 바부르가 1526년 델리를 빼앗은 지 30년이 지났지만 행정은 엉성했다. 자민다르가 각자 세금을 걷고 황실에 일부를 바치는 구조였는데, 얼마를 바칠지는 영주가 정했다. 중앙이 정확한 세입을 알 수 없었고, 예산을 짤 수도 없었다. 24장에서 본 몽골 제국이 정복한 땅에서 세금을 거두되 그 숫자를 하나로 합산할 줄 몰랐던 것처럼, 무굴도 같은 문제 앞에 서 있었다. 악바르는 그 문제를 다른 방향에서 공략했다. 정복 대신 측량으로.

1570년대 초, 악바르는 디완 토다르 말과 함께 세율 개정에 착수했다. 토다르 말은 측량 기사 수백 명을 제국 북부 여러 구역에 보냈다. 기사들은 대나무 장대와 쇠사슬 줄로 경작지를 실측하고 토지를 네 등급으로 나눴다. 1등급 폴라즈는 매년 경작 가능한 땅, 4등급 반자르는 황무지에 가까운 땅이었다. 세금은 각 등급의 10년 평균 수확량을 기준으로 약 3분의 1을 루피로 냈다. 자민다르가 임의로 조정할 수 없는 숫자였다. 같은 시기 악바르는 관료와 군사 지휘관에게 계급을 부여하고, 계급에 따라 봉토 수입을 지급하되 봉토의 소유권은 황제가 쥐는 만사브다리 제도도 정비했다. 지금으로 치면 직급표와 연봉 체계를 공개 규정으로 묶은 것이다. 세금 수취 구조와 관료 급여 구조가 동시에 정비되자 제국은 처음으로 이듬해 수입을 예측할 수 있게 됐다.

자브트 체계가 자리를 잡자 라힘의 마을에서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이웃 마을의 농민 유수프가 밀밭을 갈아엎고 면화를 심었다. 세금을 루피로 내야 했으므로 수확물을 팔아야 했고, 더 비싸게 팔리는 작물이 필요했다. 면화가 그랬고, 쪽빛 염료인 인디고가 그랬으며, 사탕수수가 그랬다. 악바르는 이 작물들에 세율 혜택까지 달았다. 17세기 인도는 세계 직물 교역의 약 25퍼센트1)를 담당했다. 특히 벵골 한 지방이 네덜란드의 아시아 실크 수입의 약 80퍼센트2)를 공급할 만큼, 인도 면직물은 국제 교역의 핵심이었다. 영국이 아시아에서 수입하는 물품의 95퍼센트가 인도산이었고, 네덜란드가 아시아에서 들여오는 물건의 40퍼센트가 벵골 한 지방에서 나왔다. 유럽 상인들은 인도 물건을 살 은이 없을 때 금을 꺼냈다. 악바르 재위 말년인 1600년, 황실 금고의 연간 수입은 1,750만 파운드에 달했는데3), 200년 뒤 대영제국 국고 총수입이 1,600만 파운드였다. 그 시절 인도 전체 GDP는 세계의 24퍼센트를 차지했다4). 그 숫자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유수프는 몰랐다. 면화 씨앗을 심으면서 그는 그냥 더 비싸게 팔고 싶었을 뿐이다.

자브트 체계에는 설계상의 빈틈이 하나 있었다. 10년 평균 수확량으로 세금을 계산하는 원칙은 안정된 시기에는 정밀했지만, 가뭄이 오면 농민을 파탄 낼 수 있었다. 악바르는 흉년 면제 조항과 개간 장려 조항을 뒀다. 장부는 숫자로 가득했지만, 그 숫자를 어떻게 적용할지는 결국 그것을 손에 쥔 사람이 결정했다. 좋은 관리 아래에서 자브트 체계는 농민의 생산을 독려하는 도구였다. 악바르는 체계를 잘 설계하면 다음 사람도 그 설계를 따를 것이라고 믿었다. 당신이 그 재무 장관이었다면 같은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 장부가 아무리 정밀해도, 그것을 쥔 손이 다르면 장부는 다른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라힘의 밭에 측량관의 쇠사슬이 다시 와서 같은 거리를 재던 날에야 비로소 알게 될 것이었다.


1679년 아우랑제브는 이슬람교를 믿지 않는 신민에게 부과하는 인두세 지즈야를 부활시켰다. 악바르가 폐지한 지 115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재무 관료들은 힌두교 농민층의 조세 저항이 세수를 오히려 줄일 것이라는 계산을 다시 올렸다. 아우랑제브는 읽고 무시했다. 예상대로 됐다. 라힘의 손자 카림이 사는 마을에서 세율은 수확량의 절반을 넘겼고, 카림은 어느 가을 황소를 팔아 세금을 냈다. 다음 봄에는 밭을 갈 수 없었다. 밭을 버리는 농민이 늘면서 경작지가 줄었고, 경작지가 줄면서 세수도 줄었으며, 줄어든 세수를 메우기 위해 세율이 다시 올랐다.

1682년, 아우랑제브가 데칸 원정을 명했을 때 재무 관료들은 이미 장부를 들고 있었다. 대군이 25년을 싸우면 세수가 버티지 못한다는 계산이 나왔다. 1700년 제국의 연간 세수는 1억 파운드에 달했지만 군사비는 그것을 넘어서고 있었다. 상주문이 황궁에 쌓였다. 아우랑제브는 그것을 읽었다. 읽고서 데칸으로 다시 행군했다.

1707년 아우랑제브가 죽었을 때 지방 총독들은 세금을 중앙으로 보내는 대신 각자의 군대를 먹이는 데 썼다. 1719년에만 황제가 네 명 교체됐다. 1739년 페르시아의 나디르 샤가 델리로 들어왔고, 한 달 만에 황제의 공작 왕좌와 수백 년치의 금은보화를 실어 떠났다. 토다르 말의 쇠사슬이 잰 땅은 그대로였고, 자브트 장부도 그대로였다. 달라진 것은 그것을 쥔 손이었다. 같은 체계가, 같은 숫자가, 다른 손에 쥐여졌다.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영국 동인도 회사가 1757년 플래시 전투 이후 벵골을 장악하고 1765년 세금 징수권을 확보한 뒤 가장 먼저 한 일은 새로운 측량이 아니었다. 무굴의 자브트 기록 창고를 열었다. 토다르 말의 측량 기사들이 쇠사슬로 잰 땅의 기록, 10년 평균 수확량과 등급 분류표가 모두 그 자리에 있었다. 동인도 회사 직원들은 황제의 이름 대신 회사의 인장을 찍고 같은 숫자로 세금을 계속 걷었다.

그런데 회사가 그 숫자를 다루는 방식은 달랐다. 악바르 시대 자브트 체계에는 흉년 면제가 있었고, 작황에 따라 세율이 조정됐으며, 지역 사정을 아는 세무관이 판단을 내렸다. 회사는 그 조항들을 걷어냈다. 고정 금액 징수로 바꾸고, 납부 불이행 시 토지를 경매에 부쳤다. 같은 장부, 다른 목적. 악바르 시대 인도의 1인당 소득은 영국의 60퍼센트였다5). 1950년 독립 당시 그 비율은 5퍼센트 수준에 불과했으며, 같은 기간 인도의 세계 산업 생산 비중은 25퍼센트에서 2퍼센트로 추락했다. 장부는 중립이 아니었다. 숫자는 같았다. 그 숫자를 어디에 쓸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숫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것이 악바르도, 토다르 말도, 라힘도 끝내 어쩌지 못한 것이었다. 제도는 설계할 수 있다. 그러나 제도를 물려받을 손은 설계할 수 없다. 수메르의 슐기가 6만 5,000장의 판으로도 토양이 죽어가는 것을 막지 못했듯, 악바르의 쇠사슬은 그것을 쥔 손이 바뀌는 날을 막지 못했다. 숫자는 도구다. 도구는 손을 가리지 않는다.


라힘은 그날 아침 밭 경계의 돌을 줄 맞춰 세웠다. 숫자가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고 믿었다. 토다르 말의 쇠사슬이 닿는 동안만큼은 그 믿음이 맞았다. 측량관이 왔고, 쇠사슬이 땅을 쟀으며, 숫자가 나왔고, 라힘은 그 숫자만큼 루피를 마련했다. 억울하지 않았다. 기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힘의 손자 카림이 황소를 팔아 세금을 내던 그 밭에서, 동인도 회사의 측량관도 같은 쇠사슬을 꺼냈다. 숫자는 같았다. 그 숫자가 누구의 손 안에 있는지만 달랐다. 장부가 무기가 된다는 것은 이제 알았다. 그런데 무기에는 방향이 있다. 은과 향신료가 지나간 길에서, 장부는 처음으로 한쪽으로만 흘렀다. 측량관의 쇠사슬이 닿은 자리마다 세금이 생겼고, 그 세금이 흘러간 방향의 끝에는 언제나 같은 자리가 있었다. 라힘은 자신이 청구서를 받는 쪽에 서 있다는 것을 알았다. 몰랐던 것은, 그 청구서가 자신의 손자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도착한다는 사실이었다.

주석

1) 위키피디아 '인도 경제사' 항목은 무굴 제국이 세계 GDP의 '약 4분의 1'을 생산했다고 서술하나, 직물 교역 25퍼센트 수치는 발췌 어디에도 명시되지 않으며 OpenAlex 'Reversal of Fortune' 및 Textile 항목 역시 해당 수치를 제공하지 않아 출처 불명확하다. (출처: Wikipedia: Textile; OpenAlex: Reversal of Fortune)

2) OpenAlex 'How India Clothed the World'는 남아시아가 글로벌 섬유 교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논하지만, 벵골이 네덜란드 아시아 실크 수입의 80퍼센트를 공급했다는 구체적 수치는 발췌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출처: OpenAlex: How India Clothed the World)

3) Wikipedia '인도 경제사' 항목은 무굴 제국이 세계 최대 경제·제조 강국이었음을 언급하나, 악바르 재위 말년 황실 수입 1,750만 파운드 대 대영제국 1,600만 파운드라는 비교 수치는 발췌 어디에도 확인되지 않는다. (출처: Wikipedia: Economic history of India)

4) Wikipedia '인도 경제사'는 무굴 황제 아우랑제브 치하에서 인도가 '세계 GDP의 약 4분의 1'을 생산했다고 서술하는데, 이는 악바르 시대가 아닌 17세기 후반 아우랑제브 시대에 해당하며 시기 귀속에 이견이 있다. (출처: Wikipedia: Economic history of India)

5) Wikipedia '인도 경제사'는 무굴 시대 인도의 경제적 번영과 이후 탈산업화를 서술하나, 악바르 시대 1인당 소득이 영국의 60퍼센트였고 1950년 독립 당시 5퍼센트로 추락했다는 구체적 비율은 발췌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출처: Wikipedia: Economic history of In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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