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 계좌를 처음 만든 날을 기억하는가. 화면에 뜬 숫자가 내 것이 됐다는 감각, 그 숫자가 어디서 나오는지 알 필요는 없다는 느낌. 증권사는 수익률 그래프를 보내고, 배당 통지서를 보내고, 잔액을 알려준다. 나머지는 경영진에게 맡기면 된다. 이 구조가 어디서 왔는지 묻는 사람은 드물다. 그 구조가 처음 만들어진 날 아침, 암스테르담 운하 옆 공증인 사무소 앞에 긴 줄이 서 있었다. 1602년 3월, 양모 상인 헨드릭 판 데르 베르흐는 여명이 운하를 물들이기 전부터 자리를 잡고 있었다. 손에는 300길더가 들어 있었다. 아버지가 십오 년 동안 포목 거래로 모은 돈이었고, 그는 지금 그것을 종잇조각 한 장과 바꾸러 왔다. 줄에 선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배가 돌아올지도 모르는데 미리 돈을 낸다니. 헨드릭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숫자를 알았다. 향신료 한 자루의 반다 제도 매입가와 암스테르담 판매가 사이의 간격이 얼마나 먼지를. 돌바닥은 차갑고 젖어 있었다. 그의 발이 그 감촉을 기억했다. 그날 암스테르담에서만 모인 청약 자금은 약 367만 길더였고, 여섯 개 도시 챔버를 합산한 초기 자본금은 644만 길더에 달했다. 역사상 처음으로 전쟁 선포, 조약 체결, 화폐 주조 권한이 단일 기업 특허장에 명문화됐다. 귀족도 왕실도 이 자본에 끼지 않았다. 서기, 포목상, 의사, 과부가 돈을 냈다. 헨드릭은 주식 증서를 안쪽 주머니에 넣고 집으로 걸어갔다. 운하 위에 안개가 깔렸다. 그 종잇조각이 무엇을 작동시킬지,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
암스테르담 주식 거래소는 지붕이 없는 광장이었다. 비가 내리면 상인들은 모자를 눌러쓰고 소리를 질렀다. 항구에서 귀환 선박 신호가 올라오면 주가가 뛰었고, 폭풍 소식이 들리면 주가가 빠졌다. VOC 주가는 1602년 공모가 기준으로 1637년에 약 270 수준이었다. 설립 35년 만에 시가총액은 약 1,930만 길더였다. 그해 튤립 파동이 암스테르담을 휩쓸었지만 VOC는 끄떡없었다. 향신료는 튤립처럼 시들지 않으니까. 에스파냐와의 팔십 년 전쟁 내내 홀란트주는 세금을 담보로 채권을 발행했고, 상인들은 그 채권을 거래하는 방식을 익혔다. 베네치아가 프레스티티로 처음 내일을 팔았다면, 네덜란드는 그 원리를 전쟁 기계에 직접 연결하는 방법을 완성했다. VOC는 그 구조를 기업 차원에서 복제했다. 선박이 출항하기 전에 귀항 후의 수익을 담보로 자금을 빌리고, 배가 돌아오면 이자와 함께 갚았다. 미래의 향신료가 오늘의 자금을 낳는 구조. 반다 제도의 화산 토양에서 자라는 씨앗 하나가 유럽 금융 시스템 전체의 기둥이 됐다. 1602년 정부 특허장은 그 기둥을 지키는 방법을 조문으로 명시했다. 지금으로 치면 무역부와 국방부와 법무부를 주식회사가 흡수한 것이다. 효력 범위는 희망봉 동쪽에서 마젤란 해협 서쪽까지, 사실상 아시아 전체였다. 광장 귀퉁이에서 호가를 외치던 전직 동인도 항로 선원은 반다 제도가 어떤 곳인지 알았다. 주가가 어디서 나오는지도. 그러나 그는 그냥 외쳤다. 아는 자와 모르는 자가 같은 광장에서 같은 가격을 치르는 것, 그것이 암스테르담이었다.
그 광장이 처음 열리고 십이 년이 지난 1614년, 코엔은 상급자에게 건의서를 올렸다. "경험으로 아시아의 무역은 자국의 무기 보호 아래서만 추진되고 유지될 수 있으며, 그 무기의 비용은 무역의 이익으로 충당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요컨대 전쟁 없는 무역도, 무역 없는 전쟁도 유지될 수 없습니다." 회계사가 선박을 보냈고, 선박이 병사를 실었다. 무역과 전쟁은 같은 장부의 두 항목이었다. 그리고 1621년 3월, 그 항목이 실체를 드러냈다. 코엔의 병력 1,655명과 일본인 용병 286명1)이 반다 제도 론토르 섬 해안에 상륙했다. 육두구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자생하는 그 섬에는 원주민 1만 5,000명이 살았다. 그들은 육두구를 네덜란드에만 팔라는 계약을 거부하고 영국 상인들과도 계속 거래했다. 그것이 이유였다. 석 달이 지났을 때 살아남은 반다인은 1,000명이 채 되지 않았다. 섬에는 곧 새 주민이 채워졌다. VOC와 계약을 맺은 네덜란드 농장주들과 자바 출신 노예들이었다. 섬에서는 여전히 육두구 향기가 났다. 반다 점령 이후 육두구 매입 원가는 이전 대비 크게 낮아졌다. 원가가 내려가면 마진이 올라가고, 마진이 올라가면 배당이 늘어난다. 코엔이 학살 경과를 보고한 편지는 이사회 의사록에 깔끔하게 정리됐다. 표제는 '독점 확보, 수익 증대'였다. 병사의 임금과 선박 비용은 장부에 기재됐지만, 1만 명이 넘는 죽음에는 항목이 없었다. 헨드릭은 그해에도 배당금을 받았다. 17세기 황금기 내내 VOC의 이익은 매출의 약 18퍼센트에 달했고, 배당은 당시 유럽의 어떤 대출 금리보다 높았다. 암스테르담의 장부와 반다 제도의 장부는 한 번도 합산되지 않았다. 살아 있는 것들의 가격은 기재됐다. 죽은 것들의 비용은 기재되지 않았다.
1700년대로 접어들자 유럽인의 식탁이 바뀌었다. 육두구와 정향이 있던 자리를 커피와 차가 밀어냈다. VOC는 면직물, 커피, 설탕으로 전환했지만 이 상품들의 마진은 향신료에 비할 수 없이 낮았다. 같은 수익을 유지하려면 더 많이 팔아야 했고, 더 많이 팔려면 더 큰 함대가 필요했고, 더 큰 함대는 더 많은 빚을 요구했다. 1660년대에 연 4,000명 수준이던 파견 인력은 1720년대에 연 7,200명으로 늘었다. 조직은 커졌지만 이익은 쪼그라들었다. 반다 학살로 장악한 독점이 세상의 입맛 앞에서 서서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이사회는 배당을 줄이지 않았다. 1700년대 초부터 1760년까지, 유럽에서 벌어들인 이익을 초과하는 배당이 거의 매 10년마다 지급됐다. 그 차이를 메운 것은 아시아에 쌓아둔 무역 자본이었다. 1760년대에 들어 배당 초과는 멈췄지만 수십 년간 속을 파먹은 손실은 멈추지 않았다. 1730년부터 1780년 사이에 아시아 무역 자본은 400만 길더 줄었고, 유럽 유동 자본은 2,000만 길더 감소했다. 속이 비어가는데 겉은 멀쩡한 구조가 수십 년간 이어졌다. 식민지 자산과 유럽 자산은 별도 장부로 관리됐고, 통합 결산은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경영진은 상황을 알았다. 주주들에게 알릴 의무가 없었다. 배당을 줄이는 순간 주가가 무너질 것이었고, 주가가 무너지면 신용이 무너지고, 신용이 무너지면 새 채권을 발행할 수 없었다. 그 연쇄를 막는 방법은 단 하나, 다음 배당을 제때 지급하는 것이었다. 이사들은 그 사실을 알면서 배당을 이어갔다. 구조가 그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알면서도 멈출 수 없는 기계였다.
처음으로 내일을 판 것은 베네치아였다. 그러나 그 내일을 기업의 언어로 번역해 온 세계에 팔아치운 것은 암스테르담이었다. 1799년 VOC가 해산될 때 국가가 떠안은 부채는 최소 1억 길더를 넘었다. 역사상 가장 거대한 규모의 합작회사 해산이었다. 청구서는 납세자에게 돌아갔다. 문제는 장부가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장부는 정확했다. 다만 보여주지 않은 것이 있었다. 반다인 약 1만 4,000명의 사망·실종, 아시아 무역 자본의 공동, 그리고 배당이 미래를 잠식하고 있다는 사실. 보이지 않는 항목들이 먼저 무너졌다. 투자자와 경영진 사이의 그 간격은 구조적인 것이었다. VOC가 파산해서 생긴 간격이 아니라, 처음 종잇조각이 발행되던 순간부터 이미 설계된 간격이었다. 아는 자와 모르는 자가 같은 광장에서 같은 가격을 치르도록 만든 것, 그것이 암스테르담이 세계에 팔아넘긴 진짜 발명품이었다. 런던의 어느 커피하우스에서 그것을 배워 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헨드릭이 그날 새벽 공증인 사무소 앞에서 두 발로 느꼈던 차갑고 젖은 돌바닥의 감촉은 어떤 장부에도 적히지 않았다. 그가 손에 쥔 종잇조각은 미래의 언어였고, 그 언어는 세계를 샀다. 반다 제도의 육두구 향기는 사라진 지 오래지만, 1602년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난 것들은 아직 살아 있다. 주식회사, 채권 시장, 증권 거래소, 그리고 투자자와 경영진 사이에 언제나 존재하는 그 간격. 우리는 지금도 같은 광장에 서 있다. 배당 통지서를 받으며 나머지는 묻지 않는다. 1799년 VOC의 청구서가 네덜란드 납세자에게 돌아왔을 때 암스테르담의 운하는 그날과 같은 빛깔이었다. 헨드릭의 발바닥이 기억하던 그 돌바닥 위로 새로운 줄이 서기 시작했고, 런던의 어느 커피하우스에서는 VOC가 파산한 이유보다 VOC가 작동한 이유를 더 오래 공부한 사람들이 다음 종잇조각을 준비하고 있었다.
주석
1) 위키피디아 반다 제도 정복 항목은 코엔 지휘 하의 학살과 강제 추방, 기근·질병으로 섬이 심각하게 인구가 줄었다고 서술하나, 상륙 병력 수치(1,655명·일본인 286명)나 생존자 1,000명 미만이라는 구체적 수치를 명시하지 않아 본문 주장의 세부 수치와 발췌 간에 편차가 있다. (출처: Wikipedia: Dutch conquest of the Banda Island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