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회계 28화 — 전쟁을 외상으로 샀다

신용카드 명세서를 받아본 사람이라면 안다. 지난달 긁은 금액이 이달 청구서에 찍히는 그 간격을. 그 간격이 클수록, 그 사이에 쓴 돈이 많을수록, 청구서가 오는 날은 더 조용히 두렵다. 그런데 국가도 신용카드를 긁는다. 전쟁을 치르고, 제국을 유지하고, 적을 돈으로 산다. 다만 국가의 청구서는 다음 달이 아니라 다음 세기에 도착한다. 그것도 서명하지 않은 사람에게.

1694년 7월, 런던 머서스 홀. 서른여섯 살의 스코틀랜드 상인 윌리엄 패터슨은 양피지 한 장을 앞에 두고 잠시 손을 멈췄다. 잉크 냄새와 촛불 연기가 뒤섞인 공기 속에서 홀 안의 다른 상인들은 그의 서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120만 파운드를 영국 정부에1) 빌려주는 대신 중앙은행 설립 인가를 받는 계약이었다. 국왕 윌리엄 3세는 프랑스와의 전쟁 비용이 급했고, 패터슨은 그 급함의 값을 정확히 알았다.

서명하는 순간 패터슨이 느낀 것은 단순한 이익 계산이 아니었다. 채권자가 왕의 생존에 이해관계를 갖는 순간, 그는 국가의 편이 된다. 왕이 망하면 채권자도 망하기 때문이다. 그 논리가 수백만 파운드 규모로 제도화될 때 무엇이 만들어지는지를, 패터슨은 아직 몰랐다. 그가 펜을 들었다. 계약서가 닫혔다.


27장에서 네덜란드 VOC가 증명했듯, 암스테르담의 자본 시장은 세계 어느 곳보다 정교했다. 영국은 그것을 배워서, 더 크게 키웠다. 윌리엄 3세는 네덜란드에서 런던으로 올 때 빈손이 아니었다. 암스테르담의 금융 기법과 인적 네트워크, 그리고 국가 신용을 화폐처럼 유통하는 개념을 함께 가져왔다. 잉글랜드 은행은 처음부터 공공 기관이 아니었다. 민간 주주들이 소유했고, 지금으로 치면 중앙은행이 상장 기업인 형태였다. 이 기묘한 혼종이 오히려 강점이 됐다. 주주들은 정부가 채무를 지키는 것이 곧 자신의 이익임을 알았다. 왕이 망하면 나도 망한다. 그러니 왕이 이겨야 한다. 그러니 왕을 도와야 한다. 패터슨의 직관이 수백만 파운드짜리 제도로 굳어지는 데는 몇 년이 걸리지 않았다.

1696년 아이작 뉴턴이 조폐국 감사관으로 임명되면서 또 하나의 기둥이 세워졌다. 물리학자로 더 유명하지만, 그의 진짜 유산 중 하나는 금본위제의 사실상 설계자라는 지위다. 뉴턴은 1699년 조폐국장직을 이어받은 뒤, 1717년에 금 1온스를 3파운드2) 17실링 10.5펜스로 공식 고정했고, 이 가격은 1931년까지 유지됐다. 지폐가 언제든 금으로 바뀐다는 확신, 그것이 정부 채권에 투자하는 런던 상인들의 심리를 떠받쳤다. 패터슨의 서명이 신뢰의 틀을 만들었다면, 뉴턴의 계산이 그 틀에 금속의 무게를 더했다.

두 장치가 맞물리자 영국의 전쟁 자금 조달 비용은 경쟁국보다 현저히 낮아지기 시작했다. 7년 전쟁은 그 증명이었다. 1756년 시작된 이 전쟁은 역사상 최초의 세계대전이라 불리기도 한다. 유럽, 북아메리카, 인도, 아프리카 해안, 카리브해까지 전선이 뻗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영국 국채는 약 7,460만 파운드에서 약 1억 2,200만~1억 3,300만 파운드로 거의 두 배가 됐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국채 이자율이 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내려갔다. 같은 시기 프랑스는 정반대였다. 이자율을 높이고, 세금을 올리고, 급기야 국가 채무 일부를 떼어먹는 파산 선언을 반복했다. 영국이 3% 수준으로 빌릴 때 프랑스는 훨씬 높은 이자를 냈다. 같은 규모의 군대를 유지하는 비용이 세 배 이상 차이 났다. 프랑스는 캐나다를 잃고 인도에서 밀려났다. 전장의 패배가 아니었다. 영국이 수십 년에 걸쳐 쌓은 것을 프랑스는 채무 불이행을 반복하며 스스로 허물고 있었다. 그런데 7년 전쟁의 승리가 새로운 균열을 만들었다.

광대한 북아메리카 영토를 지키려면 군대가 필요했고, 군대에는 돈이 필요했다. 영국 재무장관 조지 그렌빌의 대답은 단순했다. 보호받는 사람들이 내야 한다. 1765년 인지세법은 신문, 법률 문서, 계약서, 카드 한 벌에까지 세금을 붙였다. 금액은 크지 않았다. 하지만 식민지 주민들에게는 영국 의회에 대표를 보낼 권리가 없었다. "대표 없이 과세 없다"는 구호는 그렇게 태어났다. 1773년 보스턴 차 사건, 1775년 렉싱턴의 총성, 1776년 독립선언. 전쟁 비용을 아메리카에 전가하려던 런던의 회계 결정이 제국의 가장 부유한 식민지를 분리시켰다. 독립전쟁이 끝났을 때 국채는 다시 팽창해 약 2억 5,000만 파운드에 달했다3). 아메리카를 잃었는데 빚만 늘었다. 청구서를 보낼 다음 주소가 다시 필요해졌다.

1799년 영국이 도입한 소득세는 프랑스 혁명 전쟁의 전비를 감당하기 위해 태어났고, 나폴레옹 전쟁 내내 그 역할을 이어갔다. 나폴레옹은 반대로, 혁명 시대 초인플레이션의 기억 때문에 국채 발행을 끝까지 꺼렸고 약탈과 점령지 분담금으로만 전비를 충당했다. 나폴레옹은 영국의 이 흐름을 끊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영국을 "가게 주인들의 나라"라고 비웃었고, 1806년 대륙봉쇄령으로 런던 금융 시장을 질식시키려 했다. 계산은 틀렸다. 영국의 국채는 취약점이 아니라 동원 기계였다. 나폴레옹 전쟁 기간 동안 영국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포르투갈 등 동맹국들에게 약 4,629만 파운드의 보조금을 지급했다. 나폴레옹에 맞선 모든 국가들의 전쟁 비용 일부를 런던이 댔다. 전쟁이 한창인 중에도 영국 국채 이자율은 5~6% 수준을 유지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장은 영국이 이긴다고 베팅하고 있었다. 영국은 지더라도 다음 전쟁을 빌릴 수 있었다. 나폴레옹은 이길 때만 다음 전쟁을 살 수 있었다. 약탈은 소진되지만 신용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버텼다. 1813년 라이프치히에서 패배했을 때, 나폴레옹의 위성 국가들은 이미 세금을 낼 능력을 잃어 있었다. 청구서를 보낼 곳이 없어진 것이었다. 워털루는 그 계산의 결론이었다. 결론이 나온 뒤에야, 아무도 소리 내어 묻지 않았던 질문 하나가 조용히 수면 위로 올라왔다.


국채를 살 수 있는 사람은 돈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런던의 상인, 토지 귀족, 은행가들. 세금은 모든 사람이 냈지만, 국채 이자는 그들에게 돌아갔다. 직물 공장의 직공이 낸 세금 일부가 시티 오브 런던 채권 보유자의 분기 이자로 전환되는 방식이었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1815년, 영국의 국채는 GDP의 약 200%를 넘어섰다. 오늘날 세계 최고 부채 비율로 꼽히는 일본과 같은 수준을, 영국은 200년 전에 경험했고, 무너지지 않았다. 이 사실에서 사람들은 종종 국채의 안전함을 읽는다. 읽혀야 할 것은 다른 쪽에 있었다. 그 빚을 갚기 위해 더 많은 식민지가 필요했고, 더 많은 무역이 필요했고, 더 많은 세금이 필요했다. 제국이 팽창하지 않으면 그 빚의 이자를 감당할 수 없었다. 팽창이 멈추는 순간, 장부 자체가 흔들렸다.

그렇다면 그 팽창을 가능하게 한 자원은 어디서 왔는가. 누구의 땅에서, 누구의 노동에서, 누구의 허기에서 왔는가. 런던의 어떤 국채 장부에도 그 항목은 적혀 있지 않았다. 패터슨이 1694년 서명한 계약서에는 두 사람의 서명이 있었다. 청구서는 서명하지 않은 사람에게 날아갔다. 계약 당사자들이 그것을 알면서 적지 않은 것인지, 처음부터 그 칸이 없었던 것인지 — 어느 쪽이든 결론은 같다. 장부는 기록하는 자가 정한 칸 안에서만 정직하다.


패터슨 자신은 다리엔 사업 실패로 재정적으로 크게 기울었다. 말년에 영국 정부로부터 일부 배상을 받았지만, 젊은 날 쌓은 부를 되찾지는 못했다. 제국을 설계한 사람이 자신의 설계 안에서 끝내 번영하지 못했다. 머서스 홀에서 그가 펜을 들던 순간, 촛불 연기와 잉크 냄새가 뒤섞인 그 공기는 그의 손을 떠나 수십 년을 살아남았다. 잉글랜드 은행은 오늘도 런던 스레드니들 가에 있고, 영국 국채는 오늘도 거래된다. 그 청구서의 최종 지급자가 누구였는지는, 다음 챕터의 장부에 기록되어 있다.

주석

1) 위키피디아 항목은 잉글랜드 은행이 1694년 정부의 은행 겸 채무 관리자로 설립되었다는 사실만 언급할 뿐, 120만 파운드라는 구체적 대출 금액은 어떤 발췌에서도 확인되지 않아 수치 검증이 불가하다. (출처: Wikipedia: Bank of England)

2) 위키피디아 금본위제 항목은 1717년 뉴턴이 은·금 교환 비율을 너무 낮게 설정해 사실상 금본위제가 채택되었다고 기술하나, 온스당 3파운드 17실링 10.5펜스라는 구체적 가격과 1931년 종료 시점은 해당 발췌에 명시되어 있지 않아 세부 수치 확인에 한계가 있다. (출처: Wikipedia: Gold standard)

3) 위키피디아 미국독립전쟁 재정비용 항목은 영국이 독립전쟁에서 2억 5,000만 파운드를 지출했다고 명시하나, 이는 전쟁 지출 총액이며 전쟁 종료 시점의 국채 잔액과 동일한 개념인지 여부는 발췌만으로 확정할 수 없다. (출처: Wikipedia: Financial costs of the American Revolutionary War)

함께 읽으면 좋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