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회계 29화 — 인도의 숫자, 영국의 부

매달 관리비 고지서가 온다. 항목은 적혀 있다. 청소비, 경비비, 시설 유지비. 그 돈이 실제로 이 건물에 쓰이는지 확인하는 세입자는 드물다. 관리사무소가 장부를 공개하지 않는 한, 세입자는 항목을 믿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관리사무소가 다른 건물 주인의 소유라면, 그 돈이 정말 이 건물에 쓰이는지는 장부를 읽을 수 있는 사람만 알 수 있다. 믿기 어렵지만, 1765년 벵골에서 시작된 일이 바로 그것이었다.

1765년 8월, 캘커타의 밤은 눅눅했다. 후글리 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기름기처럼 피부에 달라붙는 계절이었다. 람 찬드라는 세무청 창고 안에서 장부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무굴 제국의 지방 세무관으로 이십 년째, 그는 벵골의 논 한 뙈기에서 한 해 얼마가 나오는지, 직물 한 필이 시장에서 얼마에 팔리는지 손등의 주름처럼 알았다. 그러다 문서가 도착했다. 동인도 회사. 8월 12일 알라하바드에서 서명된1) 조약에 따라 벵골·비하르·오리사 세 주의 디와니(diwani)를 양도받는다고 적혀 있었다. 조약 당일 무굴 황제 샤 알람 2세가 날인한 디와니 파르만도 함께였다. 디와니는 지금으로 치면 기획재정부 권한이다. 세금을 설계하고, 징수하고, 처분하는 권력 전체. 람 찬드라는 문서의 잉크 냄새를 맡았다. 알라하바드에서 캘커타까지 며칠이 걸렸을 뿐이었다. 잉크가 아직 덜 마른 것 같았다. 나와브(태수)는 여전히 궁에 앉아 있었다. 세금만 이제 다른 곳으로 흘렀다. 무역 회사가 세금을 걷기 시작했다.


1765년 이전까지 동인도 회사는 이름 그대로 상인이었다. 인도의 면직물을 사서 런던에 팔고, 영국산 모직물을 가져와 인도에 팔았다. 그런데 영국 모직물은 팔리지 않았다. 인도의 모슬린은 유럽 귀족들이 탐낼 만큼 섬세했고, 영국 모직물은 뜨거운 아대륙의 기후에 맞지 않았다. 회사의 장부는 만성 적자였다. 이 구조에서 빠져나올 출구를 회사는 전쟁에서 찾았다. 1757년 6월 23일 플라시. 약 3,000명의 영국-세포이 연합군이 5만 명의 벵골 군대와 맞섰다. 전투는 하루 만에 끝났다. 회사는 벵골군 지휘관 미르 자파르에게 제후 자리를 약속하고 미리 매수해 놓았다. 개전과 동시에 자파르의 군대가 방향을 돌렸고, 벵골 나와브는 도주하다 처형됐다. 칼이 아니라 거래가 제국의 문을 열었다. 국채를 발행해 전쟁 비용을 조달한 뒤 점령지 수익으로 갚는 방식이 영국 제국의 외연을 넓혔다면, 플라시에서 시작된 이 거래는 그 외연이 이미 다른 대륙의 세금 구조 자체를 삼키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알라하바드 조약으로 디와니를 손에 넣은 회사는 즉시 세율을 높였다. 일부 지역 기준으로 무굴 시대 농민들이 수확의 10분의 1을 세금으로 냈다면, 회사 지배 아래 일부 지역에서는 수확의 절반 이상이 징수됐다. 당시 회사의 연간 무역 수익과 맞먹는 금액을 밑천 한 푼 들이지 않고 매년 거두는 구조가 완성됐다. 이 거래를 성사시킨 로버트 클라이브는 런던 이사회에 편지를 썼다. 인도는 무한한 보물의 나라라고. 당신이 그 이사회 의원이었다면, 이 편지를 읽고 어떤 질문을 먼저 떠올렸을까. 그 보물이 어디서 나오는지는, 아마 첫 번째 질문이 아니었을 것이다.

1772년 행정권과 사법권까지 회사 손에 넘어왔다. 람 찬드라는 새 방식을 익혀야 했다. 이전 무굴 체계는 작황에 따라 세율이 달랐다. 가뭄이 들면 감면이 있었고, 지역 사정을 아는 세무관의 재량이 있었다. 회사의 원칙은 달랐다. 고정 세율, 기한 내 납부, 예외 없음. 회사는 런던 주주들에게 배당을 약속했고, 배당이 있으려면 수익이 예측 가능해야 했다. 유연성은 회계가 아니라 인간의 언어였다. 그 언어가 장부에서 지워졌다. 람 찬드라의 손은 여전히 같은 숫자를 적었다. 숫자가 향하는 방향만 바뀌어 있었다.

1770년 봄, 벵골의 논은 이상하게 조용했다. 전년도 수확 감소가 발단이었지만, 더 깊은 문제는 고정 세율이 농업 국가의 기본 완충재를 없애버렸다는 것이었다. 수확기에 창고에 쌓아두었다가 파종기에 씨앗으로 꺼내 쓰는 방식, 이것이 인도 농촌이 수백 년 동안 흉년을 버텨온 방법이었다. 그 여유분이 사라졌다. 토지세는 흉년에도 같은 금액이었다. 납부하려면 곡물을 팔아야 했다. 팔 곡물이 없으면 논을 팔아야 했다. 논을 팔고 나면 내년이 없었다. 그해 벵골에서 기근이 시작됐다. 사망자는 700만~1,000만 명으로 추산된다. 당시 벵골 전체 인구의 4분의 1에서 3분의 1에 해당한다. 기근 와중에도 회사는 징수 방침을 강행했다. 신임 총독 워런 헤이스팅스 본인도 훗날 1771년 이후 세금 징수가 폭력적으로 유지됐다고 인정했다. 1769년 9월 다카의 나이브 나짐(총독 대리) 무함마드 레자 칸은 이미 기근 직전의 상황을 포트 윌리엄에 보고했고, 같은 달 존 카르티에가 런던 이사회에 공식 경고를 보냈지만, 징수 방침은 바뀌지 않았다. 죽어가는 사람들에게서 거둔 세금이 런던으로 갔다. 회사의 장부에는 사람의 죽음이 항목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이후 벵골의 논밭 일부는 양귀비 밭으로 바뀌었다. 회사는 아편 생산을 독점하고 벵골산 아편을 중국에 수출했다. 면직물을 팔 수 없어 시작한 제국이 마약을 팔아 장부를 메웠다. 수백만 명이 사라진 논에서, 다음 작물은 아편이었다.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1867년, 런던의 이스트 인디아 어소시에이션 강연장에 낯선 발음의 이름이 적힌 초청장이 돌았다. 다다바이 나오로지. 인도 파르시 출신으로 수학 교수로 시작해 면화 무역상을 거친 이 인물의 손에는 계산서가 있었다. 그가 수십 년에 걸쳐 추적한 숫자였다. 세금, 무역 독점, 금융 통제를 통해 영국이 인도에서 매년 빼내는 금액. 그는 이것을 인도 세수의 약 4분의 1에 달하는 규모라고 추산했다. 그는 이것을 '부의 유출(drain of wealth)'이라고 불렀다. 청중석이 술렁였다. 수치가 과장됐다는 반론, 회계 방법이 잘못됐다는 지적, 인도가 철도와 법치를 얻지 않았느냐는 반문이 쏟아졌다. 나오로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계산서를 다시 펼쳤다.

역사학자 앵거스 매디슨이 훗날 집계한 숫자는 다른 이야기를 한다. 1700년 인도의 GDP는 세계 전체의 약 22~25퍼센트였다. 중국과 나란히 세계 경제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영국의 식민 지배가 공고해진 19세기를 거쳐 1952년에는 그 비율이 3.8퍼센트로 떨어졌다. 1947년 독립할 때 인도의 비중은 4퍼센트 아래였다. 같은 기간 영국의 비중은 올랐다. 어딘가에서 줄어든 것이 다른 곳에서 늘었다. 숫자는 그렇게 움직인다. 1857년 세포이 항쟁으로 동인도 회사가 해산되고 영국 왕실이 직접 인도를 통치하게 됐을 때도 회로는 그대로였다. 철도를 놓고 전신선을 깔았지만 그 건설 비용은 인도의 세금으로 충당됐고, 철도가 실어 나른 것은 인도의 원자재였다. 주인만 바뀌었다. 나오로지가 강연장에서 계산서를 펼치던 시각, 빅토리아 여왕의 인도 통치는 아직 34년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 계산이 드러내는 가장 불편한 사실은 영국 지배자들이 이것을 몰랐느냐는 질문과 맞닿아 있다. 나오로지가 계산을 발표하기 훨씬 전, 회사의 내부 문서에도 비슷한 우려가 기록돼 있었다. 인도의 자원이 소진되면 세금 기반 자체가 무너진다는 경고였다. 그 경고문을 쓴 관리들은 인도 총독부 청사 서랍에 서류를 넣었고, 징수 방침은 바뀌지 않았다. 당신이 그 관리였다면 그 서랍을 닫는 손이 떨렸을까. 아니면 그것이 그저 해야 할 일이었을까.


람 찬드라의 손자는 캘커타의 영어 학교를 다녔다. 영국식 회계를 배웠고, 영어로 보고서를 썼다. 장부를 정리하면 숫자는 런던으로 흘러갔다. 세대가 바뀌어도 방향은 같았다. 그런데 그 손자가 익힌 것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었다. 착취의 회계를 배운다는 것은 착취의 구조를 읽는 법을 배운다는 뜻이기도 했다. 제국이 길러낸 회계사들 가운데 일부는 결국 그 구조를 향해 계산서를 내밀었다. 나오로지가 수십 년에 걸쳐 유출 규모를 추산해낼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제국의 숫자 언어를 먼저 익혔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람 찬드라의 손자 같은 이들이 캘커타에서, 봄베이에서, 마드라스에서 각자 익혀가던 바로 그 언어였다.

회사가 인도에서 설계한 구조는 몰랐던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던 것이었다. 런던의 주주들은 배당을 기다렸고, 전쟁 비용은 계속 불어났으며, 점령지의 세금이 그 청구서를 메웠다. 징수 기계를 멈추는 순간 모든 것이 함께 멈추는 구조가 완성되어 있었다. 1765년 8월의 그 창고에서 람 찬드라가 잉크 냄새를 맡던 그 순간, 첫 번째 부품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는 그것이 수백만 명의 죽음을 지나 한 세기 뒤에도 같은 방향으로 돌아가게 될 줄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아니면, 알았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멀리 동쪽, 에도의 창고 앞에서는 쌀 냄새와 함께 다른 종류의 균열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곳의 사무라이들은 칼 대신 운반 증서를 들었고, 그들의 적은 전장이 아니라 장부 안에 있었다.

주석

1) 위키백과 알라하바드 조약 항목에 따르면 조약은 1765년 8월 12일이 아닌 16일에 서명되었다. (출처: Wikipedia: Treaty of Allahab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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