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급이 오른다는 통보를 받은 날을 기억하는가. 숫자가 커졌다는 사실에 먼저 안도가 온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도 생활이 나아진 것 같지 않다면—물가가 봉급보다 빨리 올랐거나, 화폐의 실질 가치가 조용히 줄었거나. 숫자는 분명히 늘었는데 손에 쥐는 것은 줄어드는 그 감각을 설명할 언어를 사람들은 좀처럼 갖지 못한다. 1750년 가을 아침, 에도 창고 앞의 가와시마 다이스케가 그랬다.
새벽빛이 아직 가시지 않은 시각, 가와시마는 창고 문을 열기 전에 잠시 멈췄다. 코끝에 먼저 닿는 것은 냄새였다. 습하고 구수하고 약간 무거운, 묵은 쌀 냄새. 손에는 오사카로 보낼 운반 증서가 들려 있었다. 올해 봉록 200석을 오사카 쌀시장으로 내보내야 비로소 현금을 받을 수 있었다. 어젯밤부터 쌀값이 또 떨어졌다는 소문이 돌았다. 창고 문을 열기도 전에 이미 오늘의 계산이 어디서 끝날지 그는 알고 있었다.
그는 전국시대를 끝낸 사무라이의 후손이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1603년 에도에 막부를 열었을 때 증조부는 전투의 공으로 100석을 받았다. 150년이 흘러 봉록은 두 배가 되었다. 그런데 가와시마는 증조부보다 가난했다. 쌀 한 가마의 가치가 그 사이 절반 이하로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칼을 찬 채로 오늘 아침도 이 창고 앞에 서서, 자신이 왜 가난한지 설명할 언어를 갖지 못했다. 막부도 마찬가지였다.
1석은 약 150킬로그램, 성인 한 명이 일 년을 먹기에 충분하다고 여겨지던 양이다. 막부는 이 단위로 모든 것을 정렬했다. 번의 크기, 다이묘의 위계, 사무라이의 봉록, 세금 부과 기준—지금으로 치면 기획재정부에 가까운 역할을 한 감정봉행의 장부는 단 하나의 숫자로 채워졌다. 석고. 쌀 생산량이 곧 국력의 척도였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이에야스는 260여 개 다이묘를 칼 대신 쌀로 묶었다. 1만 석 이상이면 다이묘, 그 이하면 하타모토였다. 가가번 마에다 가문은 102만 5,000석으로 도쿠가와 다음의 실력자였고, 변방의 작은 번들은 1~2만 석에 불과했다. 권력의 서열이 쌀의 양으로 표시되었고, 서열이 쌀의 흐름을 결정했다. 막부의 공식 석고는 전국 약 2,500만 석이었지만 실제 수확량은 공식 석고를 크게 웃돌았다는 추정도 있다. 절반이 장부 밖에 있었다.
이 시스템은 강력했다. 번이 반란을 일으키려면 쌀을 확보해야 했고, 쌀을 확보하려면 막부의 눈을 피해야 했는데, 막부의 장부가 쌀의 흐름을 모두 쥐고 있었다. 반란의 연료 자체가 감시의 대상이었다. 쌀로 세운 감옥은 칼로 부술 수가 없었다. 다만 그 감옥에는 막부도 갇혀 있었다. 석고가 크면 클수록 막부의 눈도 더 정확히 그쪽을 향했고, 눈을 피하려는 힘도 함께 커졌다. 그 감옥의 벽이 어디서 먼저 금이 갔는지는, 오사카에서 드러났다.
막부의 장부가 쌀을 쥐고 있었다면, 오사카의 상인들은 쌀의 가격을 쥐었다. 1697년 오사카 도지마에1) 쌀시장이 문을 열었다. 처음에는 현물 거래였다. 다이묘가 봉지에서 거둔 연공미를 오사카로 보내면, 거상들이 대금을 치르고 쌀 수령증인 물표를 발행했다. 그런데 다이묘들이 수확 전에 미리 가격을 고정하고 싶다는 수요와 상인들이 가격 차이로 이익을 보려는 욕구가 만나면서 1730년 선물거래가 공식화되었다. 세계 최초의 근대적 선물거래소였다. 유럽이 인도양 향신료 무역을 두고 전쟁을 벌이는 동안, 오사카 상인들은 아직 추수하지 않은 쌀을 현재 가격으로 사고팔고 있었다.
가와시마가 창고에서 받아 든 운반 증서도 결국 이 시장으로 가야 했다. 그가 얼마를 받을지는 그가 결정하지 않는다. 수확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오사카의 누군가가 그 쌀의 가격을 거래하고 있었다. 거상 스미토모, 미쓰이 집안이 이 방식으로 수십 년 만에 중소 다이묘들의 재산을 넘어섰다. 법전에는 사농공상의 서열이 분명히 새겨져 있었지만, 장부에는 다른 서열이 적혀 있었다. 칼 찬 사람이 아래였다. 그 역전이 창고 앞 이 아침에 가와시마의 몸에 냄새처럼 스며 있었다.
칼을 허리에 차고 짚신을 만드는 무사. 에도 중후기 하타모토 골목을 걷다 보면 처마 밑에서 짚을 엮는 손, 우산 대를 다듬는 손이 보였다. 전사 계급의 손이었다. 쌀값이 내려갈수록 봉록의 실질 가치도 함께 줄었고, 에도에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현금은 쌀을 팔아서는 더 이상 채울 수 없었다.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1716년 집권하자마자 쌀값을 끌어올리려 했다. 신전 개발로 생산을 늘리고, 금 함량을 낮춘 새 화폐를 주조해 물가를 밀어 올렸다. 쌀값이 잠시 반등했다가 이내 다시 내려앉았다. 그는 "쌀 쇼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쌀로 세운 제국이 쌀값 하나를 붙잡지 못했다. 그런데 쌀 쇼군보다 훨씬 깊은 곳에서, 더 느리고 더 조용한 힘이 이미 작동하고 있었다.
에도의 다이묘들이 오사카 상인들에게 빚을 지기 시작한 것이 18세기 초라면, 그 빚이 상환 불능 수준에 이른 것은 18세기 중반이었다. 어떤 번은 연간 수입의 절반 이상을 이자 상환에 쏟아부었다. 거상들은 특정 번의 연간 쌀 수입을 수년 치 이상 선지급하는 방식으로 사실상 그 번의 재정을 담보로 잡았다. 석고제의 장부가 번의 크기를 쌀로 표시했다면, 번채 장부는 그 번의 실질 소유자가 누구인지 보여주었다. 법전과 장부가 서로 다른 나라를 기록하고 있었다.
18세기 중반 에도는 인구 100만의 도시가 되어 있었다. 오사카·교토 각 30만에서 40만. 이 도시들은 쌀로 먹고살았지만 금화와 은화로 거래했다. 조닌들은 쌀 봉록을 받지 않았다. 그들은 돈을 벌었고, 돈으로 빚을 주었고, 그 빚이 다이묘의 장부로 흘러들었다.
쌀로 기록된 권력과 돈으로 움직이는 현실 사이의 간격이 매년 벌어졌다. 감정봉행은 번채 규모를 알고 있었고, 쌀값 하락의 구조도 이해하고 있었다. 석고제를 폐기하는 순간 번들의 서열 자체가 흔들리고, 그 위에 세워진 막부의 권위가 근거를 잃는다. 처방을 내리는 손이 이미 병의 일부였다. 쌀 쇼군이 쌀값을 붙잡으려 한 것은 무지에서가 아니었다. 석고제를 지키는 것이 막부를 지키는 것과 같았고, 막부를 버리는 선택은 막부의 이름으로 내릴 수 없었다. 그렇다면 왜 그 구조가 스스로를 갉아먹었는지는, 창고 앞에 선 가와시마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이야기는 단순해 보인다. 쌀 경제가 화폐 경제에 밀렸고, 낡은 체제가 새 현실을 따라가지 못했다는 것. 그런데 그것보다 더 불편한 지점이 있다.
막부가 쌀로 세운 평화가 길어질수록, 그 평화가 키운 번영이 석고제의 기반을 직접 먹어들어 갔다. 에도 100만 인구가 먹고 마시고 거래하는 동안 쌓인 조닌의 자본이 다이묘에게 빌려줄 돈이 됐고, 그 돈이 선물시장으로 흘러 들어가 쌀값을 좌우했다. 오사카 도지마 거래소가 세계 최초의 선물거래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막부가 150년 가까이 지속시킨 안정 덕분이었다. 석고제가 만들어낸 번영이 석고제를 갉아먹는 힘을 키웠다.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도 없었다.
도시가 클수록 쌀 장부의 권위는 흔들렸고, 쌀 장부의 권위가 흔들릴수록 봉록만으로 사는 사람들은 더 가난해졌으며, 더 가난해진 사람들이 다시 도시 경제의 저임금 노동으로 빨려 들어갔다. 막부는 이후에도 세 차례 개혁을 시도한다—교호, 간세이, 덴포. 처방은 매번 같았다. 사치를 금하고, 화폐를 조정하고, 쌀 유통을 통제하려 했다. 그리고 매번 같은 이유로 실패했다. 화폐경제가 팽창하는 것을 법령이 막을 수는 없었다. 구조가 스스로 다음 위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무너지는 소리가 없었던 이유는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었다. 안에서 너무 조용히 무너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750년 가을 아침, 가와시마 다이스케는 운반 증서에 도장을 찍고 창고 문을 닫는다. 200석의 쌀이 오사카로 떠날 것이다. 얼마에 팔릴지 그가 결정하지 않는다. 창고의 구수하고 습한 냄새가 아직 그의 옷에 배어 있다. 쌀 냄새이자 빚 냄새다. 칼을 차고 있어도 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 쌀로 쓴 장부를 버리고 새로운 회계를 선택하기로 결단한 자들이 결국 새 나라를 세운다. 바다 건너 지구 반대편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다른 방식으로 제국의 재정을 틀어쥐려는 한 남자가 전쟁터의 영수증을 계산하고 있었다. 그 남자의 이름은 나폴레옹이었다.
주석
1) 오사카 도지마 거래소 관련 발췌는 1697년 쌀시장 개설이나 1730년 선물거래 공식화 날짜를 명시하지 않고 현대 법인 재편(2021년) 내용만 담고 있어, 연도 특정에 관한 학술적 이견이 있을 수 있음을 발췌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출처: Osaka Dojima Exchange,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