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관이 온다는 통보를 받은 날, 조직은 달라진다. 서랍을 정리하고, 장부를 맞추고, 설명하기 어려운 항목을 미리 지운다. 그런데 반대의 경우가 있다. 감사관이 아무 통보 없이, 새벽 다섯 시에, 점령군의 군화 소리와 함께 도착하는 경우. 그때 장부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 한 나라의 진짜 재정이다.
1807년 10월, 베를린. 피에르 다뤼는 새벽 다섯 시에 프로이센 재무부 서고 앞에 섰다. 가죽 장화가 돌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텅 빈 복도에 울렸다. 경비병이 자물쇠를 열자 문틈에서 냄새가 먼저 새어 나왔다. 곰팡이와 묵은 잉크와 오래된 양피지. 그는 코를 찡그리지 않았다. 이 냄새가 돈 냄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다뤼는 나폴레옹 황제의 군무총감(Intendant général)이었다. 보급과 재정과 행정 전반을 총괄하는 제국의 최고 관료였고, 장군들이 이기고 떠난 자리에 그가 남았다. 그의 무기는 총이 아니라 펜이었고, 전쟁의 마지막 서명은 항상 그의 손에서 나왔다. 프랑스 대육군이 예나 전투에서 프로이센을 격파한 지 꼭 일 년이 되었다. 전장의 포연은 걷혔지만, 다뤼의 싸움은 지금부터였다.
그는 책상 앞에 앉아 장부를 펼쳤다. 프로이센 연간 세입 총액, 국고 잔고, 광산 수입, 소금 전매 수익, 항구 세관 실적. 숫자들이 줄지어 섰다. 그는 잠시 멈추고 목록 맨 아래에 자신의 숫자를 적었다. 전쟁 분담금. 이 숫자는 파리의 공식 예산서로 가지 않았다. 황제가 별도로 운영하는 금고로 흘러들었다. 의회의 승인도 없고, 공개 회계도 없었다. 황제만이 여는 열쇠를 가진 서랍이었다.
나폴레옹이 권력을 잡은 1799년, 프랑스 국고는 거의 비어 있었다. 혁명 정부 10년은 아시냐 지폐를 끝없이 찍어댄 시대였고, 그 결과는 초인플레이션이었다. 시장에서 빵 한 덩어리를 사려면 수레 가득 지폐를 실어 가야 했다. 금고 대신 종이가 쌓인 나라였다.
나폴레옹은 취임 첫 주부터 두 가지를 동시에 했다. 지폐를 없애고, 세금 징수를 국가가 직접 맡겼다. 1800년 설립된 프랑스 은행은 금과 은으로만 뒷받침되는 화폐를 발행했고, 구체제에서 세금을 대신 걷고 차익을 챙기던 징세 청부인 자리에 봉급을 받는 국가 관리들이 들어섰다. 지금으로 치면 국세청이 처음 생긴 것이다. 토지세와 영업세가 전국 동일한 기준으로 부과되었고, 귀족도 성직자도 예외가 없었다. 혁명이 선언만 했던 평등이 세금에서 먼저 실현되었다.
쌀이라는 현물 위에 재정 구조를 세웠다가 화폐 경제에 발목을 잡혔던 에도 막부와 달리, 나폴레옹은 처음부터 현금과 중앙 집권 행정을 결합했다. 그러나 이 구조가 전혀 다른 결과를 낳은 원인은 자금을 어디서 끌어오느냐에 있었다. 중앙 집권이 정교해질수록, 그 기계를 먹일 연료의 수요도 함께 커졌다. 나폴레옹이 세운 국세청은 스스로를 먹여 살리기에는 충분했다. 다음 전쟁을 준비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
1805년 오스트리아 원정, 1806년 프로이센 격파, 1807년 러시아와의 틸지트 협상까지, 대육군은 유럽 전체를 가로질렀다. 60만 병사를 먹이고 입히고 무장시키는 비용은 국내 세금만으로 감당할 수 없었다. 다뤼가 그 해법을 전장에서 찾았다. 점령지의 조세 수입을 즉시 압수하고, 도시마다 전쟁 분담금을 할당했다. 1805년 프레스부르크 조약으로 오스트리아에게 4천만 프랑, 1807년 틸지트 협상으로 프로이센에게 부과된 배상금은 당초 약 1억 5천만 프랑 이상이었으나 협상 끝에 1억 2천만 프랑으로 확정되었고, 1809년 다시 오스트리아에게 약 8천5백만 프랑. 학자들의 추산에 따르면, 1806년부터 1814년 사이 프랑스 군사비의 상당 부분이 프랑스 밖에서 조달되었다.
1805년 오스트리아에서 첫 분담금이 황제 금고에 들어오면서부터, 나폴레옹은 이 자금으로 병사들에게 포상을 내리고 개선문과 방돔 광장 기둥을 지었다. 리볼리 거리와 아우스터리츠 다리도 그렇게 만들어졌다. 파리 시민들이 걷는 포석 아래,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가 낸 전쟁 분담금이 깔려 있었다. 공식 예산서에는 이 지출이 한 줄도 없었다. 훗날 도멘 엑스트라오르디네르(1810년 공식 창설)로 제도화된 황제 전용 금고의 전신이었고, 제국의 영광은 장부 바깥에서 만들어졌으며, 그것을 아는 사람은 다뤼와 황제뿐이었다.
그렇다면 청구서를 받는 쪽에 있는 사람에게 그 장부는 무엇으로 느껴졌을까.
프로이센 관리 요한 크리스티안 리터는 다뤼의 청구서를 받은 날 밤,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촛불이 종이 위에서 흔들렸다. 그는 이 숫자를 국고 잔고와 비교했다. 프로이센 연간 세입의 두 배가 넘었다. 리터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거리에는 프랑스 군인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서고 안 어딘가에서는 다뤼가 새벽부터 맡았을 양피지와 묵은 잉크 냄새가 지금도 배어 있을 것이었다. 리터는 펜을 들었다. 낼 수 없는 돈을 나눠서 내는 방법을 설계하는 것이 지금 그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이었다.
공식 협상 배상금은 1억 2천만 프랑이었지만, 프로이센이 1806년부터 1812년 사이 프랑스에 건넨 총액은 그보다 훨씬 많은 1억 4천6백만에서 3억 9백만 프랑1)에 달했다는 추산이 있다. 현물 징수와 시설 접수가 배상금 바깥에서 별도로 진행된 탓이었다. 현금이 부족할 때는 현물로 채웠다. 군화 수십만 켤레, 기병 말 수천 마리, 군도 수만 자루. 광산과 소금 전매 시설은 프랑스 행정관이 접수했다. 이탈리아 북부의 밀라노에서도, 라인란트의 쾰른에서도, 같은 구조가 반복되었다.
다뤼의 행정 체계는 정복지의 재정 조직을 해체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정교하게 재편했다. 지방마다 프랑스식 세무 감독관이 파견되었고, 카다스트르라 불리는 전국 토지 측량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세금 징수 절차가 일원화되었다.
리터가 분납 계획서를 제출하러 프랑스 행정관을 찾아갔을 때, 그는 자국 관청보다 더 정확하게 프로이센의 세입을 파악하고 있는 관리와 마주쳤다. 행정관은 리터에게 분납 일정 대신 카다스트르 조사 협조를 먼저 요구했다. 땅을 재고, 소출을 기록하고, 세금 기반을 파악하는 것이 더 급했다. 프로이센을 정복한 군대는 이미 다음 전선으로 떠났지만, 세금을 걷는 구조는 지금부터 세워지고 있었다. 리터는 그 자리에서 프로이센을 더 빠짐없이 파악하고 있는 외국 관리에게 자국 세금 장부를 내어놓았다. 정복이 완성되는 순간은 칼이 아니라 장부가 열릴 때였다.
1812년 9월, 나폴레옹의 대육군이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 도시는 텅 비어 있었다. 러시아군은 퇴각하면서 창고를 불질렀고, 사흘 후 불길이 도시를 집어삼켰으며, 10월에 겨울이 닥치자 군대는 후퇴를 시작했다. 살아서 돌아온 병사는 추산에 따라 다르지만 어떤 계산으로도 원정군의 압도적 소수였다. 나폴레옹은 처음으로 프랑스 안에서 자금을 끌어내야 했다. 담배와 소금과 술에 새로운 간접세가 얹혔다. 혁명이 폐지했던 것들이 되살아났다.
바로 이 지점에서 두 제국의 장부가 나란히 놓인다. 영국은 전쟁 내내 의회의 오랜 신용을 담보로 장기 국채를 발행했고, 비교적 낮은 이자로 자금을 끌어들였다. 1799년 영국이 도입한 소득세는 나폴레옹과 싸우기 위해 태어난 세금이었다. 60파운드 초과 소득부터 누진 과세가 시작되었고, 200파운드를 넘으면 최고세율인 10퍼센트가 적용되었다. 나폴레옹은 반대로, 혁명 시대 초인플레이션의 기억 때문에 국채 발행을 끝까지 꺼렸다. 차입 대신 약탈과 과세로만 버텼다. 리터가 베를린에서 분납 계획서를 쓰던 그해에도, 영국 재무부는 런던 채권 시장에서 다음 전쟁 자금을 모으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이길 때마다 다음 전쟁을 살 수 있었다. 영국은 지더라도 다음 전쟁을 빌릴 수 있었다.
1813년 라이프치히에서 패배했을 때, 위성 국가들은 이미 세금을 낼 능력을 잃어 있었다. 다뤼의 청구서 체계가 무너진 것이 아니었다. 청구서를 보낼 곳이 없어졌을 뿐이었다. 기계는 멈추지 않았다. 연료가 사라진 것이다.
1815년 6월 18일, 워털루 전투가 오전 11시경 우구몽 농장에 대한 공격2)으로 시작되어 그날 저녁까지 이어졌다. 피에르 다뤼는 나폴레옹 치세에 이미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1806년 선출)이었다. 나폴레옹 몰락 후 부르봉 왕정 아래 복직하였으나 1815년 백일천하 때는 다시 나폴레옹 편에 섰고, 제2차 왕정복고 이후에도 처벌 없이 생존하여 1819년 귀족원 의원이 되었으며 자유주의 노선을 이어갔다. 그가 베를린 서고에서 새벽 냉기와 양피지 냄새를 맡으며 설계한 세금 체계는, 황제 없이도, 살아남았다. 나폴레옹이 점령했던 거의 모든 나라가 프랑스식 세금 제도를 유지했다. 나폴레옹 법전이 계속 쓰인 것처럼, 카다스트르도 세무 감독관도 계속 남았다. 리터가 분납 계획서를 쓰던 그 책상에서, 이제 프로이센 관리들은 프랑스식 방식으로 자국 세금을 걷었다. 정복자는 사라졌지만 장부는 남았다.
같은 시기, 제국의 동쪽 끝에서는 수십 년째 은이 한 방향으로만 흐르고 있었고, 그 흐름이 처음으로 뒤집히고 있었다.
주석
1) 위키피디아 '나폴레옹 전쟁의 경제·병참적 측면' 항목은 프로이센이 프랑스에 건넨 총액을 단일 수치로 확정하지 않고 복수의 추산 범위를 병기하고 있어, 수치 편차가 논쟁적으로 남아 있음을 시사한다. (출처: Wikipedia: Economic and logistical aspects of the Napoleonic Wars)
2) 위키피디아 '워털루 전투' 항목은 전투 개시 시각과 우구몽 공격 순서를 기술하고 있으나, 정확한 시각에 대해 '오전 11시경'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시각 특정에 이견이 존재함을 반영하고 있다. (출처: Wikipedia: Battle of Waterl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