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율이 오른다는 것이 세금을 올리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눈치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월급은 그대로인데 장 보는 값이 올라가면 실질 임금이 깎인 것이고, 세금 고지서에 적힌 숫자는 그대로인데 납세에 필요한 돈을 마련하는 비용이 오르면 사실상 세금이 인상된 것이다. 국가 재정도 마찬가지다. 무역 적자가 심화되고 통화가 빠져나가는데 장부가 그것을 기록하지 않는다면, 그 나라의 재정은 겉으로는 건전하고 속으로는 썩는다. 그 차이를 제국이 끝내 담지 않았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1839년 광저우가 그 실험장이었다.
그해 여름, 관리 웨이쥔은 광저우 세관 창고 앞에 서 있었다. 흠차대신 임칙서의 명으로 끌려온 그의 임무는 단순했다. 창고 안에 쌓인 상자 수를 세고, 장부에 기록하고, 수거 확인서에 도장을 찍는 것. 창고 문이 열리자 달콤하고 퀴퀴한 냄새가 쏟아졌다. 아편 진액이 나무에 스며든 냄새였다. 총 2만 상자. 모두 석회와 소금물에 녹여 바다로 흘려보낼 것이었다. 웨이쥔의 손이 떨렸다. 상자 하나당 수백 냥의 은 시세였으니, 그 창고 하나에 쌓인 것만 해도 800만 냥이 넘는 액수였는데, 강남의 부유한 성 하나의 연간 세수와 맞먹는 숫자였다. 광저우로 오는 길에 항구 창고지기에게 들었다. 20년 전까지만 해도 영국 상인들은 은을 싸들고 왔다고. 지금은 아편을 싣고 와서 은을 가져간다고. 어느 시점부터 흐름이 뒤집혔고, 그 방향은 아직 바뀌지 않고 있었다. 도광제는 아편이 제국을 병들게 하는 것을 목도했다. 황제가 임칙서를 광저우로 보낸 것은 도덕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장부의 문제였다.
18세기의 청나라는 은으로 호흡했다. 비단과 차와 도자기를 팔아 서방의 은을 빨아들이는 구조로 건륭제 시대를 운영했고, 18세기 후반부터 1810년 무렵까지 청으로 유입된 은이 수천만 냥에 달했다. 세금은 은으로 걷혔고, 은으로 군대가 먹었고, 은으로 황하 제방이 보수됐다. 이 구조의 핵심에는 광저우의 공행(公行)이 있었다. 정부의 면허를 받아 외국 무역을 독점한 관허 무역 창구에 가까운 이 상인 조합이 외국과의 거래를 일원화하여 은의 유입을 통제하고, 관세를 거두고, 황실로 올려보냈다. 공행 상인 뤄관위는 이른 아침 항구로 나가 영국 동인도회사 선박을 맞이하고, 거래 품목을 기록하고, 관세를 거두고, 저녁에 장부를 닫았다. 그 장부가 베이징으로 올라가는 공식 기록이었다. 은이 들어오는 한 장부는 아름다웠고, 장부가 아름다운 한 그는 관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황실의 세계는 단순하고 깔끔했다. 외국인이 팔 수 있는 것과 살 수 있는 것이 명확하게 구분되었고, 모든 거래는 지정된 창구를 통해야만 성립했다. 건륭제가 1793년 매카트니 사절단을 돌려보내며 "중국은 모든 것을 갖추고 있어 부족함이 없다"고 선언할 수 있었던 것은, 공행이 매년 거둬들이는 관세 숫자가 그 말을 뒷받침했기 때문이었다. 장부가 제국의 거울이었고, 거울은 아름다웠다. 창구 너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 창구를 통과한 것만이 공식적으로 존재했다. 뤄관위의 장부가 두꺼워질수록 창구 밖에서 새어 나가는 것에는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영국 동인도회사의 장부 담당자들은 다른 방법을 찾았다. 인도 벵골에서 아편 생산을 늘리고 중국 해안을 따라 밀수선을 띄우는 방식이었다. 공행의 창구를 거치지 않고, 관세도 없이, 장부에도 잡히지 않게. 어두운 새벽 광저우 외곽 수면에 쾌속 범선이 닻을 내렸다가 날이 밝기 전에 사라졌다. 선창에는 아편 상자가 가득했고, 현지 중간 상인들이 은을 건네고 상자를 받았다. 이 거래는 공행의 장부 어디에도 남지 않았다. 1800년 무렵 연간 4,500상자이던 아편 수입량은 1820년대 중반경 약 1만~1만 5,000상자 수준으로 증가했고, 1838~1839년에는 약 4만 상자에 달했다1). 같은 기간 청에서 빠져나간 은이 해마다 수백만에서 수천만 냥에 달했다는 추산이 당시 관리들로부터 조정에 보고됐으나, 그 실제 규모는 여전히 학자들 사이에 논쟁 중이다. 공행의 공식 장부에는 이 숫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뤄관위가 저녁마다 장부를 닫는 동안, 창고 밖에서는 제국의 혈액이 밤새 빠져나갔다.
은이 빠져나가는 속도가 유입을 앞지르면서, 은의 환율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금은 은으로 내야 했지만 농민들이 쥔 것은 동전이었다. 1800년에 동전 1,000문이면 은 1냥을2) 살 수 있었다. 1830년대에는 1,400문이 필요했고, 1840년대에는 1,500문을 훌쩍 넘겼다. 세금 고지서에 적힌 숫자는 바뀌지 않았는데, 농민이 실제로 내야 하는 동전의 액수는 40~50퍼센트 늘어난 셈이었다. 추수가 끝난 뒤 세금을 내러 가는 농부는, 올해 거둔 곡식을 동전으로 바꾸고, 그 동전을 다시 은으로 환전하는 두 번의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아편이 퍼질수록 동전을 빨아들였고, 동전이 아편 값으로 나가는 만큼 세금으로 낼 동전이 줄었으며, 부족한 동전을 은으로 환전하는 비용이 농가를 짓눌렀다.
그런데 지방관 누구도 황제에게 은 환율 상승이 사실상의 세금 인상이라는 보고를 올리지 않았다. 올렸다가는 관할 지역을 통제하지 못하는 무능한 관리로 낙인찍힐 수 있었다. 하급 관리들 사이에서도 아편 흡연이 만연해 있다는 보고가 조정에 올라와 있었는데, 그 보고서를 읽는 중앙 관리들의 일부도 같은 연기를 들이마시고 있었다. 세관 관리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편 상자 한 개를 통과시킬 때마다 관리 한 명의 주머니에 은 몇 냥이 들어갔고, 그 은은 어떤 장부에도 기록되지 않았다. 아편이 불법인 줄 모르는 관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눈을 감은 것은 무지가 아니라 선택이었다.
웨이쥔이 광저우로 오는 길에 지나쳤던 중원의 농촌 마을들. 허름한 쪽방마다 달콤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연기 한 모금이 농부 하루 품삯의 몇 배였고, 한 달을 피우면 한 해 세금이 날아갔다. 그 선택들이 쌓인 자리에서, 웨이쥔은 창고 문을 열고 있었다.
임칙서가 2만 상자를 바다에 녹여보내는 23일 동안, 웨이쥔은 매일 창고 앞에 서서 숫자를 적었다. 달콤하고 퀴퀴한 냄새는 열흘이 지나도 가시지 않았고, 파도 위로 희뿌연 연기가 피어올랐다. 은으로 환산하면 800만 냥이 넘는 것들이 소금물에 녹아 사라지는 것을 그는 한 상자도 빠짐없이 기록했다. 이것으로 끝날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끝나지 않았다.
1840년 여름, 증기선을 앞세운 영국 함대가 광저우 앞바다에 나타났다. 목재 정크선과 구식 포대로 구성된 청의 해군은 기술적으로 압도적인 영국 해군 앞에 연전연패했다. 인구가 건국 초기의 세 배로 늘어도 세수는 연간 4,000만 냥 안팎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밀수로 빠져나간 은의 실제 규모는 집계된 적이 없었다. 환율 상승이 농민의 실질 세 부담을 40~50퍼센트 가까이 올려도 장부에 반영된 적이 없었다. 청은 쓸 수 있는 재정이 얼마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장부가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영국군이 양쯔강을 거슬러 올라가 난징으로 향하자 도광제는 항복했다. 대운하가 막히면 강남의 쌀이 베이징에 닿지 못한다. 1842년 난징 조약. 홍콩 할양, 다섯 항구 개방, 배상금 2,100만 달러(은화), 공행 독점 폐지. 그리고 관세 자주권 박탈. 이제 청은 스스로 세율을 정하지 못한다.
무너진 것은 전쟁터에서가 아니었다. 수십 년 전, 장부가 보지 않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이미 시작된 일이었다. 은이 빠져나가는 속도를 아는 사람들이 있었어도, 그 숫자를 들고 아무것도 바꿀 수 없는 자리가 있었다. 보고가 위험한 구조 안에서 진실은 침묵이 됐다. 장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것을 기록하지 않았을 뿐이고, 그것이 제국을 죽였다.
웨이쥔은 조약 사본을 손에 들었을 때 관세 자주권 포기 조항을 오래 들여다봤다. 기획재정부 전체를 내준 것과 다를 바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아편 2만 상자를 없애는 데에는 23일이 걸렸다. 이 조항을 되돌리는 데에는 훨씬 긴 시간이 걸릴 것이었다. 그해 여름 창고 앞에서 처음 맡았던 달콤하고 퀴퀴한 냄새가 조약문 종이 냄새에 섞이는 것 같았다. 아편의 냄새인지 썩어가는 장부의 냄새인지, 그는 끝내 구분하지 못했다. 창고지기가 말했다. 20년 전까지만 해도 은을 싸들고 왔다고. 그 말이 귀에 맴돌았다. 지금 그 은은 어디 있는가. 태평양 건너편 작은 섬나라의 관리들이 일지에 이 소식을 옮겨 적으면서, 대포 구경과 전함 척수 옆에 손으로 짧게 메모를 덧붙였다. 장부를 지키지 못한 나라에 무슨 일이 생기는지, 그들은 이제 숫자로 알았다.
주석
1) Wikipedia 'History of opium in China' 항목은 1838년 수입량을 40,000상자로 명시하면서도 1820년대 중반의 구체적 수치(1만~1만 5,000상자)는 제시하지 않아, 성장 궤적의 중간 수치에 이견이 존재한다. (출처: Wikipedia – History of opium in China)
2) 해당 연구는 1820년대 이후 수입 은화의 품질 저하와 스페인 아메리카 페소화 프리미엄이 환율 변동의 핵심 원인이라고 주장하며, 단순한 아편 대금 유출설로는 은-동전 교환 비율 악화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이견을 제시한다. (출처: 'A Trojan Horse in Daoguang China?: Explaining the flows of silver (and opium) in and out of China' (20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