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회계 33화 — 아시아 최초의 산업 제국

국가가 돈을 쓰는 방식을 보면, 그 나라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보인다. 예산서는 숫자의 목록이 아니라 공포의 지도다. 어느 항목이 불어나고 어느 항목이 쪼그라드는지를 따라가다 보면, 그 나라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가 지침보다 정직하게 드러난다. 1880년대 일본의 예산서를 처음 받아 든 사람이라면 낯선 감각을 느꼈을 것이다. 교육, 철도, 공장, 군대. 항목들이 한 방향을 향해 기울어져 있었다. 어디서 시작해서 어디서 끝나는지는, 그 예산서의 첫 줄에 쓰여 있지 않았다.

1882년 10월, 오사카 방적 공장 건설 현장. 마쓰다 겐타로는 진흙 위에 무릎을 꿇고 영국제 방추 기계의 설치 도면을 펼친다. 서른두 살. 오와리 번 소속 하급 무사 출신이었으나 메이지 유신으로 번이 해체되면서 칼을 내려놓았다. 지금 그의 손에는 철제 볼트와 스패너가 쥐어져 있고, 도면에는 영어와 일본어가 뒤섞여 있다. 영국인 기사가 팔짱을 낀 채 어깨 너머로 내려다보는데, 겐타로는 그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척하며 글자 하나하나를 손가락으로 짚어 읽는다. 이 기계 한 대 가격이 자신의 평생 녹봉보다 많다. 공장 굴뚝이 아직 세워지지 않은 자리에 빈 하늘이 열려 있다. 10월의 햇살이 기계 표면에서 반사되고, 겐타로는 다시 도면으로 시선을 내린다. 연기는 없다. 아직.

그가 조립하는 기계는 면사를 뽑는다. 그러나 이 공장이 세워진 자리에 먼저 온 것은 기계가 아니었다. 세금이었다.


메이지 유신이 시작된 1868년, 일본의 세금은 봉건 시대 그대로였다. 약 300개의 번이 저마다 독자적인 재정을 운영했고, 세율도 징수 방식도 달랐다. 쌀로 걷느냐 현금으로 걷느냐도 번마다 달랐다. 중앙 정부는 국가 전체 수입을 집계할 방법이 없었다. 정부가 아니라 소영주 연합에 가까운 구조였다. 군대를 만들려면 돈이 필요하고, 돈을 모으려면 세금이 필요하며, 세금을 걷으려면 먼저 전국 토지가 하나의 장부에 올라야 했다.

1873년, 메이지 정부는 지조개정을 단행했다. 전국 토지를 국가가 직접 측량해 화폐 가치로 환산하고, 토지 소유권을 개인에게 공식 인정하며, 그 시가의 3%를 매년 현금으로 납부하게 하는 세 가지가 핵심이었다. 국가가 처음으로 전 국토를 하나의 장부에 올린 것이다. 결과는 즉각적이었다. 지조개정 이후 수년간 정부 세입의 약 70~80%가 토지세에서 나왔다. 쌀이 엔이 됐고, 엔이 군함이 됐다. 그러나 그 변환의 비용은 농민이 치렀다. 흉년에도 세금 금액은 변하지 않았다. 소작농이 현금을 마련하지 못하면 땅을 잃었다. 1876년 이세 폭동 등 지조개정 반발 봉기와, 사족 반발이 정점에 달한 1877년 세이난 전쟁이 뒤따랐다. 장부의 질서는 들판의 분노 위에 세워졌다.

겐타로의 아버지는 번의 창고지기였다. 가을마다 쌀 가마니를 세는 것이 일이었다. 지조개정 이후 그 일은 사라졌다. 쌀은 더 이상 세금이 아니었고, 아버지는 새 일을 찾지 못한 채 고향을 떠났다. 아버지가 빠져나간 자리에 겐타로가 들어섰다. 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공장 현장 감독이 된 남자. 토지세 개혁이 흩뜨려놓은 사람들이 방적 공장으로 모여드는 흐름 속에서, 겐타로는 스패너를 쥔 채 영국인 기사의 눈길을 받고 있었다. 꼭 한 세대 전, 청나라가 아편전쟁에서 세관 통제권을 잃던 장면을 일본의 관리들은 일지에 꼼꼼히 옮겨 적었다. 그들의 메모에는 대포 구경 옆에 한 줄이 더 있었다. 장부를 남에게 빼앗기면 어떻게 되는가. 그 질문의 답을 겐타로의 손이, 도면 위를 짚으며, 조립하고 있었다.

두 번째 전환은 공장이 손을 바꾸는 방식으로 왔다. 메이지 정부는 1870년부터 1885년 사이 산업 육성에 약 3,200만 엔을 쏟아부어 나가사키 조선소, 미이케 탄광, 아이치 방적소 등 관영 모범 공장들을 직접 세웠다. 지금으로 치면 국가가 반도체 공장을 짓고 운영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1880년대 들어 이 공장들의 적자가 재정부를 압박하자 정부는 방향을 틀었다. 투입액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가격으로 민간에 넘기기 시작한 것이다. 이 불하를 받아챈 것이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였다. 막부 시절부터 상업과 무역에 능했던 이 상인 가문들은 국가가 닦아놓은 공장과 광산과 조선소를 기반으로 산업 전반을 장악하는 재벌로 성장했다. 국가가 위험을 감수하며 씨앗을 심었고, 열매는 특정 가문들이 거뒀다. 겐타로가 도면 위를 짚던 그 손의 감각으로 조립한 기계가, 다른 사람의 이름이 찍힌 공장 안에서 돌아가기 시작했다.

재벌이 수익을 내면 정부에 세금이 들어오고, 그 세금으로 다시 인프라를 깔고, 인프라 위에서 재벌이 더 큰 수익을 내는 회로가 조용히 완성되고 있었다. 국가가 먼저 씨앗을 심는 방식이 열매를 낳는다는 것은 증명됐다. 그 열매가 누구에게 가는지는 처음부터 다른 문제였다.

그리고 회로가 완성된 시스템은 다음 단계를 스스로 요구했다. 세 번째 엔진이 켜진 것은 전쟁이었다. 1894년 청일전쟁이 시작될 때 일본의 연간 국가 예산은 약 1억 엔이었고, 전쟁 비용은 그 두 배를 넘겼다. 정부는 국채를 발행하고 세율을 올렸다. 그런데 1895년 4월 시모노세키 조약이 모든 계산을 뒤집었다. 청나라가 지불하기로 한 배상금 2억 냥에 랴오둥반도 반환 대가 3,000만 냥을 더하면 총 2억 3,000만 냥이었다1). 당시 일본 연간 예산의 약 3배, 총 세입으로는 약 3.8배에 달하는 거액이 한꺼번에 국고로 흘러들어왔다. 도쿄 회의실에서 그 배분 계획서가 작성됐다. 절반 이상이 군비 확충으로 향했고, 야하타 제철소 건립과 군항 조성에도 상당 부분이 배분됐으며, 교육과 황실 기금에 나머지가 쓰였다. 야하타 제철소는 이 배상금을 기반으로 1897년 착공되어 1901년 첫 쇳물을 쏟아냈다. 면사 공장은 소비재를 만들지만, 제철소는 군함을 만든다. 겐타로가 조립하던 방추 기계 수천 대를 살 수 있었던 돈이 이번엔 용광로를 세우는 데 쓰이면서, 장부의 무게중심이 조금씩 이동하고 있었다.


배상금이 국고에 들어오던 해로부터, 산업 투자로 향하던 자금이 군사 계정으로 이동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청일전쟁 직전 30% 아래였던 국가 예산 대비 군사비 비중은 10년 뒤 40%에 육박했다. 방향은 한 번도 바뀌지 않았고, 속도만 달라졌다. 1904년 러일전쟁이 터졌을 때 전비는 약 18억 엔에 달했고, 그 절반에서 3분의 2 수준을 영국과 미국 금융 시장에서 빌린 외채로 충당했다. 산업화의 성과가 전쟁 담보로 쓰였다.

그 이면에는 장부에 기록되지 않은 것들이 쌓이고 있었다. 지조개정이 만든 구조는 농촌을 짜서 도시 공장을 돌리는 회로였다. 오사카 방적 공장의 방적공 대다수는 지방에서 올라온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의 여성들이었다. 공장 기숙사에 거주하며 하루 12시간 교대로 일했다. 평균 근속 기간은 2년이 채 되지 않았고, 결핵 발병률은 일반 인구의 두 배를 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겐타로가 설치한 방추 기계가 돌아가기 위해 필요한 신체들이었다. 그 신체들은 어떤 장부에도 기록되지 않았다.

메이지 정부가 서구 열강으로부터 배운 것은 기술과 법률과 헌법만이 아니었다. 조선을 보호국으로, 타이완을 식민지로, 만주를 세력권으로 만들었다. 그 각각의 단계마다 회계 장부가 먼저 열렸다. 점령 지역의 토지 가치, 철도 노선의 예상 수익, 현지 노동력의 단가. 서구 제국들이 아시아에 한 것을 일본은 아시아 안에서 반복했다. 장부는 그 언어보다 언제나 솔직했다.

그것이 문제의 핵심이었다. 장부가 솔직할수록 더 이상한 것들이 드러난다. 토지세로 공장을 세우고, 공장 수익으로 군함을 만들고, 군함으로 배상금을 받아오는 이 회로는 어느 단계에서도 스스로 멈추지 않았다. 멈추려면 다음 전쟁을 포기해야 했고, 다음 전쟁을 포기하면 전쟁 준비에 쌓인 국채가 빚으로 남았으며, 빚이 남으면 그것을 메울 다음 전쟁이 다시 필요했다. 장부를 읽을 수 있었던 사람들은 그 회로를 보고 있었다. 그들이 무지해서 멈추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멈출 수 없는 회로가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1912년 메이지 천황이 죽었을 때 일본의 무역량은 1873년의 세 배가 넘었고, 철도 노선은 전국을 이었으며, 의무교육 취학률은 90%를 넘어섰다. 아시아에서 서구식 산업화에 성공한 최초의 국가였다. 겐타로가 진흙 위에 무릎을 꿇고 방추 기계 도면을 짚던 그 자리에, 실제로 연기가 피어오르는 굴뚝이 섰다. 그가 완성한 것이 맞다. 다만 그 굴뚝이 어느 방향으로 연기를 내뿜게 될지는, 도면 위에는 적혀 있지 않았다. 회로는 결국 멈췄다. 1945년 8월, 장부의 마지막 항목은 항복 문서였다. 다음 장부는 열대우림에서 열린다.

주석

1) Wikipedia의 청일전쟁 항목은 시모노세키 조약 체결 사실만 서술할 뿐, 배상금 총액(2억 냥+랴오둥반도 반환 대가 3,000만 냥)의 구체적 수치 분기나 학술적 이견을 제시하지 않는다 — 그러나 Wei-Hai-Wei 논문은 삼국간섭 이후 영토 반환 맥락을 다루면서 배상금 산정 과정의 복잡성을 시사하며, 주요 2차 문헌에서 총액 표기가 '2억 3,000만 냥'과 '2억 3,500만 냥' 사이에 편차가 있음이 지적된다. (출처: The British at Wei-Hai-Wei: a case study of an ill-fated colony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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