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오늘 운전한 차의 타이어는 어디서 왔을까. 공장에서, 맞다. 그 공장을 먹인 원료는. 고무나무에서. 그 나무가 자란 땅에는. 아무도 묻지 않는 곳에서 왔다. 묻는 것이 불편해서가 아니라, 그 땅의 이름이 처음부터 장부에 없었기 때문이다.
1909년 11월, 코친차이나 비엔호아 성의 적토지대. 응우옌 반 투안은 새벽 네 시에 눈을 뜬다. 막사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그는 어둠 속에서 손을 뻗어 칼을 집는다. 날을 새벽 이슬에 방치하면 녹이 슨다. 닦지 않으면 할당량을 채울 수 없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감독관의 회초리가 등을 가른다. 투안은 스물셋이다. 여덟 달 전, 통킹 북부의 마을로 한 남자가 찾아왔다. 사이공 남쪽 플랜테이션에서 일하면 한 달에 열두 피아스트르를 준다고 했다. 세금을 내지 못해 땅을 빼앗긴 투안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계약서에 서명했다. 계약서는 프랑스어였고, 투안은 글을 읽지 못했다. 막사 밖으로 나오면 철분 많은 붉은 흙이 발목을 삼킨다. 말라리아 모기가 새벽 공기를 채우고, 고무나무 행렬은 아직 어둠 속에 잠겨 있다. 베트남 민간에 이런 말이 돈다. 고무 농장 가는 건 쉽고, 돌아오는 건 어렵다. 남자는 시체로 나오고, 여자는 귀신으로 나온다. 투안은 칼을 들고 나무 행렬 속으로 들어간다. 하루에 베어야 할 나무는 수백 그루다. 해는 아직 뜨지 않았다.
1897년 2월, 파리에서 재무부 장관을 역임한 폴 두메르가 하노이에 발을 딛었다. 그는 부임 전부터 문제를 알고 있었다.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코친차이나·통킹, 다섯 개의 식민지가 각자의 예산을 굴리며 총독부 자금을 삼키고 있었다. 파리 본국은 해마다 보조금을 부어도 적자를 메우지 못했다. 두메르의 임무는 단 하나였다. 인도차이나를 스스로 먹고살게 만들어라.
그는 취임 첫해부터 다섯 개의 분산된 예산을 하나의 중앙 금고로 통합했다. 핵심은 세 개의 국가 전매였다. 소금, 알코올, 아편. 지금으로 치면 기획재정부가 소금과 술과 마약을 독점 판매하는 것이다. 1899년 공식화된 아편 전매는 즉각 효과를 냈다. 두메르의 재임 5년 동안 아편 수입이 50퍼센트 늘었고1), 전체 식민지 세수의 약 5분의 1에서 4분의 1을 차지했다. 두메르는 이 흑자를 담보로 2억 프랑 규모의 채권을 발행해 철도와 항구를 깔았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1897년 5,000만 프랑 수준이었던 인도차이나 수출액은 1902년 그가 떠날 즈음 수배 이상 불어났다. 숫자는 완벽했다.
그러나 전매 집행 방식에는 이면이 있었다. 소금과 알코올 세금을 내지 못하면 집과 땅을 압류했다. 프랑스 법원은 불법으로 쌀막걸리를 담근 농민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두메르의 장부는 마침내 균형을 찾았다. 그 균형을 떠받친 것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적을 칸은, 장부에 없었다. 투안의 가족이 땅을 잃은 것도 그 논리의 끝에 있었다.
땅을 잃은 사람들은 갈 곳이 필요했다. 투안이 새벽에 칼을 들고 들어선 비엔호아의 나무들은 이미 두메르 재임기에 다른 프랑스 자본이 심어둔 것이었다. 1920년대, 그 땅 위로 새로운 냄새가 번졌다. 미슐랭 타이어 회사가 코친차이나로 들어왔다. 비엔호아 성 일대의 적토, 철분이 풍부한 그 붉은 흙은 헤베아 고무나무가 자라기에 최적의 토양이었다. 1921년이면 코친차이나에만 2만 9,000헥타르의 고무 플랜테이션이 조성되었고, 1929년에는 전 인도차이나를 합쳐 9만 헥타르를 넘어섰다. 세계 자동차 산업이 팽창하면서 천연고무 수요가 폭발했고, 1930년대 후반이면 인도차이나2) 고무 수출액은 쌀 다음으로 큰 외화 수입원이 되었다.
플랜테이션 회사들은 북부 베트남의 가난한 농촌으로 모집인을 내려보냈다. 두메르는 1902년 하노이를 떠났지만, 그가 설계한 전매 체계와 토지 압류 조항은 식민지 법령으로 굳어 후임 총독들 손에서도 계속 작동했다. 그렇게 수십 년간 누적된 피해자들이 표적이었다. 계약서에는 3년이라고 쓰여 있었지만, 현장에 도착한 노동자는 숙박비·식비·의료비 명목의 부채가 이미 쌓여 있음을 발견했다. 빚을 갚기 전에는 나갈 수 없었다. 계약 기간이 끝나도 새 부채가 만들어졌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1939년 기준으로 19개 고무 회사는 3억 프랑이 넘는 수익을 거뒀다. 노동자에게 지급된 임금 총액은 그 일곱 분의 일 수준에 불과했다. 당신이 그 이사회 자리에 앉아 있었다면, 이 숫자 앞에서 무엇을 했을까.
미슐랭의 다우띠엥 플랜테이션 기록은 더 직접적이다. 두 차례 세계대전 사이 수십 년 동안, 이 농장에서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기록이 있다. 플랜테이션 노동자의 90퍼센트가 말라리아를 앓았고, 노동 시간은 최대 15시간이었다. 회사의 사망 기록에는 원인이 "안남인 특유의 불결한 생활 습관"으로 적혔다. 사망은 통계로 처리되었다. 사망자 수가 늘면 북부에서 새 모집인이 내려왔다. 공급은 수요를 정확히 충족했다. 투안이 새벽마다 빗속에서 칼을 쥐고 나무 앞에 선 것은, 그 수요를 채우는 일이었다.
1929년, 하노이의 노동 모집책이 분노한 베트남인에게 살해당했다. 이듬해 2월, 미슐랭 농장에서 파업이 터졌다. 베트남 공산당 결성 직후 발생한 첫 번째 대규모 공산당 연계 노동 투쟁으로 기록된다. 프랑스 헌병대가 들이닥쳐 지도자들을 체포했고, 재판은 경찰 정보 보고서만으로 진행되었다. 유죄 판결이 났다. 미슐랭은 이후 파업의 기억을 지우려 푸리엥 농장과 인접한 투언로이 농장을 합병하여 투언로이라는 이름으로 통합했다.
파업 직후 코친차이나 총독부는 노동 조건 개선 조사단을 꾸렸다. 보고서가 제출되었다. 사망률이 비정상적으로 높다고 명시했고, 부채 시스템이 사실상의 강제노동이라는 결론을 담았다. 보고서는 1931년 총독부 서류함에 들어갔다. 1920년대 파리 의회에서도 식민지 수익 구조를 정면 비판하는 의원들이 있었다. 국제 여론이 들끓었다. 제도는 그대로였다.
두메르의 예산 담당자들도 알고 있었다. 미슐랭 이사회도 알고 있었다. 파리 의회 위원회도 공식 문서로 받아 들고 있었다. 인도차이나를 흑자로 유지하는 구조가 어디에 기대고 있는지를 직접 서면으로 확인하고도, 그들은 장부를 닫았다.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고무값이 오르는 한, 이사회는 도덕을 의제에 올리지 않았다. 알고 있었다. 선택하지 않았다. 구조를 바꾸는 비용보다 구조를 유지하는 수익이 컸을 때, 알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것도 멈추게 하지 못한다.
반세기 동안 프랑스 제국의 재정 설계자들은 인도차이나를 흑자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두메르의 전매 체계, 미슐랭의 플랜테이션, 19개 고무 회사의 배당금은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키는 숫자들이었다. 그 숫자들을 가능하게 한 것은 법령도 특허장도 아니었다. 투안 같은 몸들이 새벽마다 칼을 들고 나무 앞에 섰다는 사실이었다. 장부에는 생산량이 올라갔다. 그 생산량을 만드는 데 무엇이 소모되었는지는 기록할 칸이 없었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숫자는 다만 죽음의 단가를 계산에 넣지 않았을 뿐이다.
1954년 제네바 협정으로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에서 물러났다. 두메르가 놓은 철도는 오늘날도 하노이와 호치민을 잇는다. 미슐랭 플랜테이션이 있던 비엔호아의 적토에서는 지금도 고무나무가 자란다. 새벽 네 시에 눈을 떠 칼을 쥔 투안은 이 모든 것의 끝을 보지 못했다. 그가 그 손으로 벤 나무에서 흘러내린 수액은 파리의 공장에서 타이어가 되었고, 그 타이어는 유럽의 자동차를 달리게 했다. 제국의 장부에 그것은 수출 수익으로 기록되었다. 투안의 손 온도는 기록되지 않았다.
프랑스가 떠난 뒤에도 그 고무나무들을 이어받은 다른 자본이 있었고, 다른 장부에 다른 이름으로 같은 수액이 계속 흘렀다. 다음 장에서 만날 제국은 훨씬 넓은 땅 위에 훨씬 더 정밀한 장부를 들고 서 있었다. 그 정밀함이 보이지 않는 것을 더 완벽하게 숨겼다.
주석
1) 해당 논문은 20세기 초 동남아시아 식민지 세수 정책의 지역별 차이를 분석하지만, 두메르 재임 중 아편 수입 50% 증가나 세수 비중 5분의 1~4분의 1이라는 수치를 직접 언급하지 않아 수치의 출처와 범위에 불확실성이 있다. (출처: Colonial Revenue Policies and the Impact of the Transition to Independence in South East Asia (2013))
2) 위키피디아 '푸리엥 도' 항목에 따르면 1930년 2월 미슐랭 농장 파업은 공산당 주도 파업으로 기록되나, 이것이 베트남 공산당 결성 '직후' 발생한 '첫 번째 대규모 공산당 연계 노동 투쟁'이라는 규정은 발췌에 명시되지 않고 '이후 봉기들의 선구'로만 서술되어 그 위상 규정에 해석상 이견이 존재한다. (출처: Wikipedia: Phú Riềng Đ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