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회계 35화 — 해가 지지 않는 장부

회계 감사를 통과한 기업이 부도를 낸다. 적법하게 인허가를 받은 건물이 무너진다. 감사인은 잘못이 없다. 그들은 제출된 서류를 검토했고, 기재된 항목을 확인했으며, 수치는 정확했다. 문제는 서류에 없던 것들이다. 처음부터 기재 항목에 없어서 검토되지 않은 것, 측정 기준 바깥에 있어서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처리된 것. 장부는 완벽하게 맞는다. 그것이 가장 위험한 이유는 그것이 틀려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어떤 것들을 세지 않기로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1866년 10월, 런던 재무부 청사 4층 창고에서 제임스 해리슨은 인도에서 올라온 보고서 묶음을 풀었다. 서른두 살의 하급 서기, 매달 이 보고서들을 항목별로 분류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그날은 봄베이 관세청에서 올라온 수입 목록이었다. 면직물, 아편, 소금, 철도 자재. 그는 각 항목 옆에 파운드 수치를 적으면서 혀끝으로 연필심을 적셨다. 잉크 냄새와 먼지가 섞인 공기 속에서 손가락은 리듬감 있게 움직였다. 1870년 기준으로 영국은 세계 총생산량의 약 9퍼센트1)를 단독으로 차지했고, 제국의 범위는 2,600만 제곱킬로미터, 지구 육지 면적의 5분의 1에 달했다. 이 광대한 영토 어딘가에서는 항상 세금이 걷히고 있었고, 그 수치들이 제임스의 책상 위로 흘러들어왔다. 바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는 그의 소관이 아니었다. 숫자는 항상 맞았다.


1842년 봄, 로버트 필 총리는 의회 연설 원고를 몇 번이나 내려놓았다. 발표할 내용이 쉽지 않았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지 30년이 지났지만 적자는 해소되지 않았고, 관세는 1,200가지 품목에 제각각 부과되어 징수 비용이 세수를 넘어서는 경우도 있었다. 밀수업자들은 복잡한 체계의 틈새를 파고들었고, 정직하게 세금을 내는 상인들은 경쟁에서 밀렸다. 필은 1816년에 폐지된 소득세를 부활시키겠다고 발표했다. 연간 150파운드 이상 소득에 파운드당 7페니, 약 3퍼센트였다. 논리는 간결했다. 소득세 수입으로 관세를 대폭 낮추면 수입이 늘고 밀수가 줄면서 세수 전체가 더 커진다. 의회 방청석 어딘가에서 누군가 그 연설을 들으며 팔짱을 꼈을 것이다. 반세기 전에도 그런 약속을 한 총리가 있었다고.

도박은 맞아떨어졌다. 1846년 곡물법 폐지와 함께 보호관세 체계가 해체되기 시작했고 수출액은 폭발적으로 늘었다. 이 체계를 완성한 것은 글래드스턴 재무장관이었다. 관세청 직원들이 수입업자에게 직접 수수료를 받던 관행이 폐지되고 월급제로 전환됐다. 세금 항목은 수백 개에서 수십 개로 줄었다. 글래드스턴은 1853년 예산 연설에서 네 시간 사십오 분 동안 자신의 재정 철학을 설명했는데 핵심은 단순했다. 국가 지출을 최소화하고, 세금은 투명하게, 징수는 효율적으로. 1869년 영국 수출액은 1억 9,000만 파운드로 1825년의 다섯 배에 달했다. 복잡함이 오히려 비용이었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었다.

이 재정 체계의 단순함이 작동하려면, 그러나 장부에는 적히지 않는 전제가 하나 필요했다. 그 전제를 떠받치는 땅은 영국 밖에, 아득히 멀리 있었다.

영국 본국의 세수만으로는 제국 전체를 유지하는 비용을 감당할 수 없었다. 인도 주둔군, 지중해 함대, 아프리카 식민 행정부. 그 비용은 어딘가에서 나와야 했고, 런던의 장부에 따로, 조용히 적혀 있었다. 1857년 세포이 항쟁을 계기로 1858년에 영국 왕실이 동인도회사의 조세 권한을 접수하면서 인도는 새로운 재정 편제 안으로 들어왔다. 인도는 자체 세수로 인도 주둔 영국군 전체를 부양해야 했다. 아프가니스탄 국경에서 복무하는 영국 병사의 급료는 봄베이 농민의 세금으로 충당됐고, 영국 의회에서 이 편제를 정면으로 문제 삼은 의원은 거의 없었다. 수치는 맞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인도의 철도는 이 편제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건설 자본은 영국 투자자들이 댔고, 그 이자는 인도 세수에서 지불됐다. 철도는 영국 면직물을 인도 내륙 시장까지 실어 날렸고, 동시에 영국군이 반란 지역으로 신속하게 이동하는 수단이 됐다. 인프라 투자의 수혜는 영국 자본가와 영국군에게 돌아갔고, 비용은 인도가 댔다. 인도의 세수는 1870년대에 연간 약 5,000만 파운드 수준으로 추산됐다. 런던의 담당자들은 그 수치를 보며 만족했다. 세수 목표는 달성되었고, 송금은 정기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돈이 어떻게 걷혔는지는 런던의 장부에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 앞 장에서 고무 수액을 채취하던 투안의 손 온도가 프랑스 장부에 없었던 것처럼, 이 제국의 장부에도 없는 것이 있었다. 다만 규모가 달랐고, 더 오래됐으며, 더 정교했다.

장부 밖의 풍경이 어떤 것인지는, 1876년 마드라스 남부로 가야 보였다.

1877년 1월,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 황제로 추대되는 행사가 델리에서 열렸다. 행사장 인부들이 붉은 천을 기둥에 묶는 동안, 마드라스에서 100킬로미터 떨어진 마을에서 스물다섯 살의 라니는 타작이 끝난 마당 앞에 앉아 있었다. 가뭄이 두 해 연속 들었고 쌀 더미는 작년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세금 징수관은 언제나처럼 왔다. 1793년 벵골에서 도입된 영구 정착법의 원칙이 마드라스 북부 지역까지 확산되어 있었다. 토지세는 수확량과 무관하게 고정 금액으로 부과됐다. 라니는 가족이 먹을 쌀의 절반 이상을 팔아 세금을 냈고, 그 쌀은 봄베이 항구를 통해 영국으로 수출됐다. 그해 겨울이 끝나기 전에, 라니의 이름은 마드라스 기근 피해 보고서에 올라 있었다.

다다바이 나오로지는 이 흐름을 수치로 추적하고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정치경제학자 겸 재야 경제학자였다. 무역 대금, 행정 비용, 채권 이자, 영국 관리들의 퇴직 연금이 런던으로 송금되는 전체 흐름을 계산하여, 인도에서 영국으로 해마다 빠져나가는 돈이 세수의 약 4분의 1에 달한다2)고 추산했다. 그는 이것을 부의 유출이라 불렀다. 영국 의회는 그 계산을 공식 석상에서 들었다. 그리고 장부를 바꾸지 않았다. 라니의 세금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추적하는 칸은, 런던의 어느 장부에도 없었다. 칸이 없는 항목은 기록될 수 없었고, 기록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문제는 아무도 몰라서가 아니었다.


1877년 인도에서 작성된 두 보고서는 같은 인쇄소에서 같은 양식으로 찍혔다. 봄베이에서 올라온 세수 달성 보고서와 마드라스에서 올라온 기근 피해 보고서. 두 보고서는 서로 다른 수신처로 발송됐고, 각각의 서랍 안에서 수년을 기다렸다. 두 보고서가 처음 한 칸에서 만난 것은 1880년대, 승진한 제임스 해리슨이 인도 세수 보고서를 최종 검토하는 자리에 올랐을 때였다.

어느 오후, 마드라스에서 올라온 기근 피해 보고서 옆에 봄베이의 세수 달성 보고서가 나란히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피해 지역 사망자 수가 한 칸, 그해 토지세 징수율이 다른 칸. 수치들은 각각의 열에 정확하게 기입되어 있었다. 제임스는 두 보고서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세수 보고서에 이상 없음 도장을 찍었다. 기근 보고서는 구호 요청 결재를 기다리는 서랍 안으로 들어갔다.

두 보고서가 같은 칸에서 만나는 일은 이 제국의 행정 체계 안에서 처음부터 설계되어 있지 않았다. 세수 담당자는 세수를 기록했다. 구호 담당자는 구호를 신청했다. 전체 그림을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설령 볼 수 있었다 해도 체제를 바꿀 동기는 제도 안에 없었다.

기근으로 죽은 사람은 다음 해 세수 목표치에서 자동으로 빠졌다. 장부는 언제나 맞았다. 나오로지가 부의 유출을 발표하고도 수십 년간 편제가 바뀌지 않은 이유는 아무도 그 계산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알고 있었다. 아는 것이 바꾸는 것이 되지 않는 체계. 그것이 이 제국 장부의 마지막 원리였고, 그 원리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는지는 아무도 계산하지 않았다.


라니가 기근으로 죽은 1877년, 빅토리아 여왕의 인도 황제 즉위가 선포된 그해, 예산 보고서에는 이상이 없었다. 제임스 해리슨은 서랍을 닫으면서 손에 묻은 잉크를 손수건으로 닦았다. 그는 다음 보고서를 펼쳤다. 실론에서 온 차 수출 목록이었다. 영국 노동자들이 아침마다 마시는 그 차가 어디서 오는지, 그 땅에서 누가 세금을 내는지는 어느 칸에도 없었다. 손가락은 다시 리듬감 있게 움직였다. 어느 날 그 칸이 없다는 사실 자체를 청구서로 들고 나타나는 사람이 있을 것이었다. 그때 제국이 흔들리기 시작할 것이었다. 전장에서가 아니라, 이 장부의 논리가 더 이상 감춰질 수 없는 날에. 그리고 그 균열은 인도에서가 아니라, 아주 다른 형태의 숫자 속에서 먼저 터져 나올 것이었다.

주석

1) 매디슨 프로젝트 데이터베이스 업데이트 논문은 역사적 국민소득 추계 방법론의 벤치마크 선택에 따라 수치가 크게 달라진다는 점을 지적하며, 1870년 영국의 세계 총생산 비중 수치 역시 사용 벤치마크(1990년·2011년·다중)에 따라 상이하게 산출된다. (출처: Maddison‐style estimates of the evolution of the world economy: A new 2023 update)

2) 위키백과의 나오로지 항목에 따르면 그는 '부의 유출 이론'을 제시했고 1901년 저작 『빈곤과 비영국적 인도 통치』에서 이를 상술했으나, 유출액이 세수의 4분의 1에 해당한다는 구체적 수치는 해당 발췌에서 확인되지 않고 수치의 신뢰성을 둘러싼 당대 논쟁이 존재했음이 학계에 기록되어 있다. (출처: Wikipedia: Dadabhai Naoro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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