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모을수록 가난해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것이 저주가 아니라 제도였다는 것을 그들은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베를린의 제빵사 에리히 브란트는 1923년 11월의 새벽 다섯 시에 밀가루 반죽을 치댔다. 오븐의 열기, 손바닥에 달라붙는 밀가루 감촉, 이것만은 전쟁 전과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빵을 진열대에 올리는 순간 그는 가격표를 다시 썼다. 어제의 숫자는 이미 틀렸다. 오늘 그가 적어야 하는 숫자는 1,000억 마르크였다. 1914년 그가 받던 주급이 40마르크였다. 아홉 년이 아니라 아홉 광년 전 일처럼 느껴졌다.
손님들은 바구니나 유모차에 지폐를 가득 담아 왔다. 아이를 눕혀야 할 유모차에 아이 대신 돈이 실려 있었다. 거리에서는 이런 이야기가 돌았다. 도둑이 유모차에 실린 지폐 다발을 훔쳤는데, 지폐는 바닥에 버리고 유모차만 가져갔다고. 아무도 웃지 않았다. 합리적인 선택이었기 때문이다. 에리히는 퇴근하면 곧장 시장으로 달려가 오늘의 지폐를 감자와 베이컨으로 바꿨다. 내일 아침이면 그 돈은 더 가치 없어질 것이었다. 저축이란 없었다. 내일이 오늘보다 더 싸리라고 기대할 수 없는 세계에서.
이 도시에서 에리히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어딘가에서 클라라 진스하이머도 같은 거리를 걷고 있었다. 한 달 전 그녀는 통장을 해지했다. 잔액이 무엇으로 바뀌었는지를 창구 직원도 말해주지 않았고, 말해줬더라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을 것이다.
이 재앙의 출발점은 에리히의 제빵소가 아니라 1914년 8월, 베를린의 한 의회 회의실이었다. 독일 제국의회는 만장일치로 전쟁 비용을 국채로 충당하기로 결의했다. 계산은 단순했다. 1870년 보불전쟁에서 프로이센은 약 6개월 만에 프랑스를 꺾고 50억 프랑의 배상금을 받아냈다. 이번에도 빠르게 끝날 것이었고, 패전국이 빚을 대신 갚아줄 것이었다. 세금을 올리는 것은 선거에 불리했고, 어차피 적의 돈으로 갚으면 그만이었다.
베를린 거리에 포스터가 나붙었다. "독일의 승리를 믿는다면 국채를 사라." 포스터를 본 시민들은 창구로 몰렸다. 은행 직원들은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국채 신청서를 건넸다. 국민들은 애국심으로 국채를 샀고, 정부는 금본위제를 중단한 채 지폐를 찍어냈다. 지금으로 치면 중앙은행이 기준금리를 없애고 국채를 무제한 매입하는 것과 같았다. 35장에서 영국 제국이 식민지의 세수와 인도 병사의 몸으로 전쟁을 치렀던 것과 달리, 독일은 아직 오지 않은 승전 배당금을 담보로 현재를 저당 잡혔다.
전쟁이 길어질수록 장부의 구멍도 커졌다. 총 발행 국채는 1,500억 마르크를 넘었고, 이는 실질 구매력 기준으로 전쟁 전 독일 국민총생산에 육박하거나 이를 상회하는 규모였다. 클라라 진스하이머가 저축을 털어 국채를 사던 그 순간에도, 그 계산이 오직 이길 때만 성립한다는 조건이 어떤 장부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1918년 11월, 독일 제국이 항복했다. 조국을 믿으며 국채를 산 국민들은 그 종이쪽지를 쥔 채 폐허 앞에 서 있었다. 새 정부의 이름은 바이마르 공화국이었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은 독일에 1,320억 금마르크의 배상금1)을 부과했다. 협상 테이블에서 케인즈가 제시한 독일의 최대 지불 가능 금액은 100억 달러(약 400억 금마르크) 수준이었다. 부과된 금액은 그 세 배를 크게 웃도는 규모였다. 케인즈는 이 합의가 다음 전쟁의 씨앗이라고 경고했지만, 그 목소리는 조약 바깥에서만 메아리쳤다.
1921년부터 해마다 갚아야 할 배상금은 국민소득의 5~7퍼센트에 달했다. 산업이 무너진 나라에서 세금으로 그 돈을 거두어들이는 계산은 성립하지 않았다. 배상금을 지불하려면 외화가 필요했고, 외화를 사려면 마르크를 팔아야 했으며, 마르크를 팔면 가치가 더 떨어지고, 떨어진 마르크로는 더 많은 외화가 필요했다. 어느 방향으로 들어가도 출구가 없는 미로였다. 베를린의 재무부 관료들은 이 구조를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멈추는 순간 정부가 먼저 무너질 것이었기 때문이다. 구멍 난 독에 물을 붓는 대신 독을 크게 만드는 선택이었다.
바이마르 정부가 선택한 길은 인쇄기였다. 독일제국은행이 정부 채권을 인수하고 그 대가로 마르크를 찍어냈다. 1922년 말 빵 한 덩어리는 약 160마르크였다. 1914년과 비교하면 40배였지만, 이것은 폭풍 전의 고요였다.
1923년 1월, 프랑스와 벨기에 군대가 독일 최대의 석탄·철강 산업지대인 루르를 점령했다. 배상금 연체에 대한 응징이었다. 바이마르 정부는 루르 노동자들에게 총파업을 선언하며 저항을 독려했고, 파업 노동자 전원에게 임금을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재원은 또다시 인쇄기였다. 독일 전역의 인쇄공장들이 24시간 가동되었다. 마침내 종이와 잉크를 사는 비용이 찍혀 나오는 지폐의 액면가를 초과하는 순간이 왔다. 어떤 이들은 지폐 다발을 난로에 넣었다. 살 수 있는 석탄보다 지폐 자체의 열량이 더 높았기 때문이다. 1923년 11월 빵 한 덩어리는 2,000억 마르크에 달했다. 물가가 오른 것이 아니었다. 날아올랐다. 그리고 마르크의 가치는 바닥을 뚫었다.
달러당 환율은 1923년 10월 초에 2억 4,000만 마르크 수준이었으나, 10월 말에는 이미 수백억 마르크로 폭등했고, 11월에는 4조 2,105억 마르크에 이르렀다2). 지금으로 치면 미국 1달러를 사는 데 한국 돈 1조 원이 필요한 수준이었다. 에리히가 진열대에 붙이는 가격표는 매일 아침 새로 써야 했고, 가끔은 오후에 한 번 더 써야 했다. 공장들은 하루에 두 번 임금을 지급했고, 노동자들은 받는 즉시 시장으로 달렸다. 마르크는 교환의 매개가 아니라 빠르게 처분해야 할 뜨거운 감자였다. 에리히의 밀가루 감촉은 여전히 같았지만, 그것으로 산 빵의 가격을 적는 손은 날마다 낯선 숫자를 배워야 했다. 그 세계에서 가장 어리석은 선택은 모으는 것이었고, 그 가장 어리석은 선택을 성실하게 이행하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 거리에 있었다.
1919년 남편이 죽으며 남긴 유산은 5만 마르크였다. 클라라 진스하이머는 그 돈을 은행에 맡겼다. 당시로선 베를린 외곽의 작은 집을 살 수 있는 금액이었다. 성실했고 검소했다. 저축은 미덕이었다. 은행 이자는 꼬박꼬박 붙었다. 1923년 10월, 그녀는 통장을 해지했다. 원금과 4년치 이자를 더한 잔액으로 살 수 있는 것은 빵 한 조각이었다.
같은 해, 기업인 후고 슈티네스는 은행에서 거액을 빌려 쓰러져가는 공장과 광산을 사들였다.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될수록 부채의 실질 가치는 증발했고, 공장과 광산이라는 실물은 남았다. 빚진 자가 저축한 자를 완전히 뒤집어엎었다.
이것은 사기가 아니었다. 어떤 악인도 클라라의 통장을 털러 오지 않았다. 규칙을 어긴 사람도 없었다.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했을 뿐인데, 정상적으로 작동한 시스템이 가장 순종적인 사람들을 가장 체계적으로 파산시켰다. 에리히의 어머니가 30년 동안 모은 저축도 같은 방식으로 증발했다. 전시 국채를 사며 조국을 믿었던 사람들, 연금을 믿고 노후를 설계했던 노인들이 모두 같은 순서로 무너졌다. 가장 잘 따른 사람이 가장 많이 냈다. 중산층의 미덕이 처벌받아야 한다고 설계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게 설계된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것을 몸으로 느낀 사람들이 독일의 거리를 채우기 시작했고, 그들은 원인을 찾고 있었다. 원인을 가장 먼저 지목해 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에리히 브란트는 겨울이 지난 뒤에도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 밀가루를 치댔다. 1923년 11월 15일, 독일 정부가 렌텐마르크 도입을 선언했고, 구 마르크와의 교환 비율은 1조 대 1이었다. 새 화폐는 농지와 산업시설을 담보로 한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불태환지폐였다. 종이는 같은 종이였는데 인플레이션이 멈췄다. 사람들이 원한 것은 금 담보가 아니었다. 숫자가 무한정 늘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신호 하나였다.
에리히는 그날 아침 새 가격표를 적으면서 손이 잠깐 떨렸다. 익숙한 열 자리 대신 두 자리 숫자였다. 빵 냄새는 같았다. 밀가루 감촉도 같았다. 클라라의 통장이 어디로 갔는지도 변하지 않았다.
렌텐마르크 발행 엿새 전인 11월 9일, 뮌헨의 맥주홀에서 쿠데타를 선동하다 체포된 젊은 연사는 이듬해 옥중에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빵값이 안정될수록 다른 무언가가 조용히 끓고 있었다. 에리히는 새 가격표를 진열대 앞에 세우고 문을 열었다. 손님들은 들어왔다. 아직은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왔다.
주석
1) 1921년 런던 지불 계획에 따라 독일에 부과된 1,320억 금마르크 중 실제 무조건 지불 의무는 A·B 채권 합산 500억 마르크에 불과했으며, C 채권은 사실상 지불 가능성이 없는 허구적 부채로 간주된다는 학술적 이견이 존재한다. (출처: World War I reparations, Wikipedia)
2) 위키피디아 발췌는 1923년 11월 기준 달러당 환율을 4조 2,105억 마르크로 명시하고 있으나, 동일 발췌에서 1922년 중반 환율은 달러당 320마르크, 동년 12월에는 7,400마르크였음을 보여 주어 초인플레이션의 본격화 시점과 속도에 대한 세부 수치 편차가 확인된다. (출처: Hyperinflation in the Weimar Republic, Wikiped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