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회계 37화 — 담보 없는 제국

세계에서 가장 강한 통화의 담보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오늘날 미국 재무부는 한 줄로 답한다. 미합중국 정부의 신용. 황금도 아니고 석유도 아니다. 약속이다. 그 약속이 언제부터 약속만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는지, 그 순간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한 사람은 회의실 안에 없었다. 1944년 7월, 뉴햄프셔 브레턴우즈의 마운트 워싱턴 호텔. 앤드루 홀은 두꺼운 서류 뭉치를 양손으로 끌어안고 복도에 서 있었다. 서른여섯 살의 미국 재무부 회계 실무자. 잉크 냄새와 함께 약한 산 냄새가 종이 더미에서 올라왔다. 44개국 대표단이 이 산중 호텔에 들어찬 지 사흘째였고, 닫힌 문 너머에서는 타자기 소리와 영어·프랑스어가 뒤섞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회의실 안에서는 영국 대표 케인스와 미국 대표 화이트 사이의 마지막 수치 조율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홀이 들고 있는 서류의 핵심은 한 줄이었다. 금 1온스에 35달러. 그런데 홀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그 숫자가 아니었다. 미국이 실제로 보유한 금의 총량과, 그 담보로 약속하게 될 달러 발행 규모 사이의 간극이었다. 아무도 그 간극을 공식적으로 거론하지 않았다. 협상은 그것을 건드리지 않은 채 합의로 향하고 있었다. 문이 열렸다. 누군가 서류를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홀은 뭉치를 건넸다. 그의 손가락이 마지막 순간까지 종이를 놓지 않으려 했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 없었는지,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 서류가 서랍을 나온 날, 전후 세계의 통화 질서가 결정되었다.


전쟁은 달러에게 왕좌를 선물했다. 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유럽 각국은 미국으로부터 무기와 식량을 사들이면서 보유하던 금을 미국으로 넘겼다. 1945년 종전 무렵 미국은 전 세계 금 보유량의 약 3분의 2를 차지하게 되었다. 로마는 은광을 직접 캐서 데나리우스를 주조했고, 스페인은 아메리카에서 금은을 강탈해 통화를 뒷받침했다. 미국은 달랐다. 싸웠고, 팔았고, 기다렸다. 금이 저절로 흘러들어왔다.

브레턴우즈 협정은 그 금을 근거로 달러를 세계의 기준 통화로 선언했다. 다른 나라들은 자국 통화를 달러에 고정했고, 달러는 금에 고정되었다. 지금으로 치면 세계 모든 나라의 중앙은행이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기준을 따라야 하는 구조였다.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이 같은 회의에서 탄생했다. 홀 같은 실무자들이 작성한 수천 장의 협정문이 그 뼈대를 세웠다. 달러로 평화를 설계한 나라는 이듬해 원자폭탄으로 전쟁을 끝냈다.

그런데 한 나라의 화폐가 세계의 기준 통화가 되었을 때, 그 나라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는가. 브레턴우즈의 합의는 그 질문을 서랍 속에 넣어두었다. 달러가 기축통화라는 것은 전 세계가 달러를 비축해야 한다는 뜻이었고, 달러를 비축하려면 미국이 달러를 끊임없이 공급해야 했으며, 달러를 공급하려면 미국은 무역 적자를 감수해야 했다. 경제학자 로버트 트리핀은 1959~1960년 의회 증언에서 이 역설을 정확히 짚었다. 기축통화를 공급하기 위해 미국이 적자를 늘리면 달러의 신뢰가 무너지고, 신뢰를 지키기 위해 적자를 줄이면 세계의 유동성이 고갈된다는 논리였다. 그 경고는 교과서에 실렸다. 정치의 결정에는 닿지 않았다.

린든 존슨 행정부는 베트남에서 전쟁을 치르면서 달러를 찍어냈고, 군사비와 복지 예산이 동시에 팽창했다. 1960년대 말, 미국 정부가 보유한 금보다 훨씬 많은 달러가 이미 전 세계에 풀려 있었다. 프랑스 드골 정부가 먼저 달러를 금으로 바꿔달라고 요구했고, 서독이 뒤따랐다. 금 보유고가 빠르게 줄었다. 그 시점에 달러를 보유한 나라의 재무장관이었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홀의 손가락이 감지했던 그 간극이 공식 언어로 기록되기까지 27년이 걸렸다.

1971년 8월 15일 일요일 저녁, 닉슨은 텔레비전 앞에 앉아 달러의 금 태환 중단을 선언했다. 브레턴우즈 체제가 무너졌다. 세계는 잠시 흔들렸다가 달러를 계속 사용하기로 했다. 대안으로의 전환 비용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담보 없는 달러가 무엇을 먹고 살아남을 수 있는지, 그 답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 답은 사막에서 왔다. 1973년 오일 쇼크로 석유 가격이 폭등한 직후, 미국은 사우디아라비아와 비밀 협약을 맺었다. 미국이 사우디의 안보를 보장하고 군사 장비를 공급하는 대가로, 사우디는 석유 수입을 미국 국채에 재투자하기로 했다. 이를 계기로 원유의 달러 결제가 사실상의 국제 표준으로 굳어졌다. 석유는 모든 산업의 혈액이었고, 석유를 사려면 달러가 필요했으며, 달러를 갖기 위해 세계의 나라들은 미국 국채를 사들였다. 그 대금이 다시 미국의 재정으로 순환되었다. 금의 속박에서 풀려난 달러는 석유의 결박으로 세계에 더 단단하게 묶였다.

1976년 킹스턴 협정으로 달러와 금의 공식 연결이 완전히 청산된 이후, 달러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시장이었고, 그 시장을 움직이는 것은 석유였으며, 석유를 통제하는 것은 미국의 군사력과 외교였다. 달러를 아무리 많이 발행해도 미국 내 물가가 곧바로 오르지 않는 이유는, 그 달러가 세계 각국의 외환 보유고로 즉시 흡수되었기 때문이었다. 세계가 스스로 달러를 필요로 했다. 그 필요가 지속되는 한, 미국의 적자는 체제의 허점이 아니라 체제의 연료가 되었다.

2001년 이후 테러와의 전쟁에서 달러가 다시 쏟아졌고,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는 더 많은 달러가 찍혔으며, 2020년 팬데믹이 닥쳤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전 세계 외환거래의 약 88퍼센트에서 달러가 거래의 한 축을 차지했고, SWIFT 기준 국제결제에서 달러 비중은 약 절반에 달했다. 2025 회계연도 말 미국의 국가 부채는 37조 달러를 넘어섰고1), 연방 총지출의 약 14퍼센트가 이자 지급에만 쓰였다. 군비가 아니라 이자를 내기 위해 해마다 새 국채를 발행하는 구조였다. 그런데 달러는 무너지지 않았다. 브라질이 수출 대금을 달러로 받아 미국 국채를 사면, 미국 정부는 그 돈으로 다시 지출을 늘렸다. 중국은 수십 년간 미국 국채를 쌓아가며 달러를 지탱했고, 그 달러로 만들어진 무역 질서 안에서 공장을 돌렸다. 이 순환이 작동하는 동안 달러는 무너지지 않았고, 달러가 무너지지 않는 한 순환은 계속되었다. 역사상 어떤 황제도 이런 방식의 특권을 누리지 못했다. 그리고 그 특권은, 간극을 아무도 공식적으로 거론하지 않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작동하기 시작했다.


트리핀이 진짜 경고한 것은 붕괴가 아니었다. 균형을 맞추지 못하면서도 무너지지 않는 구조, 그 안에서 비용을 지불하는 쪽이 발행국이 아니라 사용국이 되는 역설이었다. 그리고 그 역설의 가장 이상한 속성은 따로 있었다. 달러를 버릴 수 없는 나라들이 비용을 감당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들이 달러를 버리는 것 자체를 선택지로 인식하지 못하도록 구조 자체가 설계되었다는 점이다.

로마 데나리우스의 은 함량이 줄어들 때 상인들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거래를 계속했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스페인이 아메리카의 은으로 제국을 운영했을 때, 은이 들어오는 속도와 나가는 속도가 어긋나는 순간 체계는 천천히 기울었다. 담보 없는 달러도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다만 스페인과 달랐던 것은 하나였다. 스페인의 은은 마르면 끝이었다. 달러의 담보는 담보를 요구하지 않기로 결정한 세계의 합의였고, 그 합의가 살아 있는 한 담보는 필요하지 않았다.

세계는 달러를 경쟁자로 여기지 않았다. 공기처럼 여겼다. 공기를 대체하겠다고 나선 나라는 아직 없었다. 그러나 어느 나라들은 이제 조용히, 다른 언어로 같은 질문을 다시 쓰려 하고 있었다. 알아도 바꿀 수 없는 구조가 있다. 그것이 가장 무거운 담보다.


홀은 브레턴우즈에서 돌아온 뒤 재무부에서 20년을 더 일했다. 퇴임 무렵 그가 후배들에게 반복해서 한 말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장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장부를 읽지 않는 사람이 거짓말을 한다고. 1944년 여름 복도에서 서류를 건네던 찰나, 잉크와 산 냄새, 그리고 손가락이 저도 모르게 종이를 더 단단히 쥐던 감각을 그는 끝내 털어버리지 못했다. 오늘날 미국 재무부가 발행하는 국채 명세서에는 담보 항목이 비어 있다. 그 자리에는 한 줄뿐이다. 미합중국 정부의 신용. 세계가 그 문구를 계속 믿는 동안, 선언된 숫자와 실제 숫자가 처음부터 달랐던 나라들에서 이미 다른 실험이 시작되고 있었다.

주석

1) Wikipedia 출처에 따르면 2026년 5월 기준 미국 국가 부채는 39조 달러로, 본문이 제시한 '37조 달러 초과'와 수치 차이가 있다. (출처: Wikipedia: National debt of the United Stat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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