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회계 39화 — 숫자가 거짓말을 했다

직장에서 나쁜 소식을 보고할 때, 사람들은 잠시 멈춘다. 그대로 올리면 어떻게 되는지 안다. 조금 다듬으면 어떻게 되는지도 안다. 합리적인 선택은 하나다. 그 선택을 강요받은 나라가 있었고, 그 선택을 스스로 한 나라가 있었다. 결과는 달랐다. 중국은 거짓 숫자를 강제했다. 소련은 거짓 숫자를 묵인했다. 방식이 달랐고, 그래서 더 오래 버텼다.

1977년, 소련 경제 전문가 블라디미르 트레믈은 서방에서 소련의 공식 통계가 실제 경제 규모를 체계적으로 과장하고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그는 소련 시민이 아니었다. 미국 듀크대학교 경제학 교수였다. 소련 내부에서는 아무도 그 계산을 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했다가는 살아남지 못하는 구조였다.

계획경제의 문제는 계획이 아니었다. 정확한 숫자를 보고한 사람이 처벌받고, 좋은 숫자를 보고한 사람이 승진하는 체계에서는 진실이 위에 닿기 전에 사라진다. 거짓 숫자는 다음 계획의 원료가 되었고, 그 계획이 새로운 거짓 숫자를 요구했다. 소련은 70년 동안 이 순환을 반복했다. 통계는 한 번도 틀리지 않았다. 다만 진실을 담는 칸이 처음부터 설계되지 않았다.

1970년 가을, 모스크바 고스플란 청사 6층. 이반 세르게예비치는 새벽 다섯 시부터 보고서 더미를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가로등만 희미하게 번지는 어둠 속에서 백열등이 누래진 서류를 비추었다. 잉크 냄새와 눅눅한 공기가 외투 소매에 배어들었다. 그의 손에는 우랄 지역 철강 공장의 9월 생산량 집계표가 들려 있었다. 숫자들은 깔끔했다. 목표치 대비 103퍼센트. 그런데 이반은 멈추었다. 지난 분기 우랄 공장의 원자재 입고량을 알고 있었다. 그 양으로는 목표치의 87퍼센트밖에 생산할 수 없었다. 23년째 고스플란에 근무한 이반은 이것이 처음이 아님을 알았다. 그는 서명란에 도장을 찍었다. 서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단지 진실을 말하지 않을 뿐이었다.


1921년, 소비에트 정부는 고스플란을 창설하면서 하나의 이념을 설계도로 만들었다. 국가 전체를 하나의 공장처럼 운영하는 것, 모든 원자재의 흐름과 노동력의 배치와 생산물의 양을 중앙에서 계산하고 지시하는 체계였다. 지금으로 치면 기획재정부와 통계청과 노동부의 핵심 기능을 단 하나의 청사에 합쳐놓은 기관이었다고 볼 수 있으나, 실제로는 시기에 따라 통계와 노동 기능이 별도 부처와 분리·합병을 반복했다. 경제학자들은 불가능하다고 말했고, 레닌은 그 비판을 들었고, 무시했다.

1928년 스탈린이 제1차 5개년 계획을 발동했을 때 이 체계는 실제로 작동하는 듯 보였다. 농업 국가였던 소련은 10년 만에 산업 생산 전반에서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공업국이 되었다. 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소에서는 밤낮으로 쇠가 녹았고, 드니프르 수력발전소의 터빈이 새벽부터 돌아갔다. 서방이 대공황으로 신음하는 동안 소련의 공식 산업 생산 증가율은 연 18에서 20퍼센트에 가까운 수치를 기록했다. 계획경제는 자본주의의 실패를 지켜보며 자신의 시대가 왔다고 믿었다.

목표치는 매년 전년 대비 10에서 20퍼센트씩 높게 책정되었다. 실제 생산력이 따라가지 못하면 두 가지 선택이 있었다. 처벌을 각오하고 미달을 보고하거나, 숫자를 고쳐 목표치를 달성했다고 보고하거나. 전자를 택한 공장장들의 일부는 사보타주 혐의로 굴라크에 보내졌다. 후자를 택한 공장장들은 다음 해 더 높은 목표치를 받았다. 허위 보고는 범죄가 아니라 생존 전략이었고, 체계 안에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당신이 그 공장장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 이반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23년 동안 매일 아침 그 답을 실행했으니까.

1958년 말, 흐루쇼프가 육류 생산 확대를 강하게 밀어붙이자 리야잔 오블라스트 공산당 제1서기 라리오노프는 한 해 동안 생산량을 세 배로 늘리겠다고 선언했다. 약속은 1959년 초 공식 발표됐고, 이듬해 그는 실제로 그 목표를 달성했다고 발표했다. 비결은 단순했다. 농민들의 가축을 무상으로 징발하고, 다른 주에서 도축용 소를 빌려와 무게를 측정한 뒤 돌려보냈으며, 이듬해 종자용으로 남겨야 할 것까지 팔아 수치를 채웠다. 다음 해 리야잔의 실제 육류 생산은 공식 발표치의 5분의 1 수준으로 폭락했다. 1960년 가을, 진상이 드러나 직위 해제 직전이나 직후에 라리오노프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1).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는 것보다, 달성한 사실이 거짓임이 밝혀지는 것이 더 위험했다.

철강 공장들은 목표 중량을 맞추기 위해 두껍고 무거운 철판만 생산했는데, 정밀 기계 부품에는 쓸 수 없는 철판이었다. 신발 공장들은 재고 회전이 빠른 소수의 사이즈만 찍어냈고, 나머지 발 치수를 가진 시민들은 수개월을 기다렸다. 못 공장들은 무게 기준 할당량이 내려오자 하나짜리 대못을 만들었고, 이듬해 고스플란이 개수 기준으로 바꾸자 이번에는 머리카락 두께의 작은 못만 생산했다. 지시는 바뀌었지만 공장장의 논리는 바뀌지 않았다. 이반의 동료 게오르기는 우랄 무기 공장 감독관이었다. 어느 겨울 밤 두 사람은 보드카를 나누며 앉아 있었고, 게오르기는 잔을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보고한 탄약의 상당 부분은 실제로 창고에 없어. 누래진 서류와 잉크 냄새가 배어 있는 사무실 대신, 지금은 보드카 냄새와 담배 연기가 그 자리를 채웠다. 이반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말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어디까지 이어질 수 있는지는, 아직 두 사람 모두 가늠하지 못하고 있었다.


1970년대 들어 소련 경제는 공식적으로 성장했다. 브레즈네프 시대의 통계는 연평균 4에서 5퍼센트 수준의 성장을 기록했고, CIA조차 1985년 소련의 GDP를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로 분류했다. 미국의 국방비 책정도, 핵 협상의 균형도, 이 수치들을 전제로 설계되었다. 겉에서 보면 초강대국이 제 궤도를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모스크바의 국영 상점 선반은 비어 있었다. 육류를 사려면 새벽부터 줄을 서야 했고, 좋은 신발을 구하는 데 수개월이 걸렸다. 통계가 성장을 말하는 동안 시민들의 장바구니는 가벼워졌다.

거짓 숫자는 다음 계획의 기초가 되었다. 허위로 보고된 철강 생산량을 기반으로 이듬해 자동차 공장의 철판 수요가 계산되었다. 과장된 곡물 수치를 근거로 다음 해 빵 배급량이 산출되었다. 거짓 데이터가 다음 거짓을 불러왔고, 각 단계마다 오차는 쌓였다. 1970년대의 실제 성장률은 공식 통계의 절반에 가까웠고, 소비재 부문의 실제 생산량은 공식 수치를 크게 밑돌았으며, 군사비는 공식 발표된 3퍼센트 미만의 수치와 달리 실제로는 국민총생산의 15에서 20퍼센트에 달하는 것으로 서방에서는 추정했다.

고르바초프가 1985년 서기장에 오른 뒤 처음으로 소련 경제의 진짜 수치를 요구했을 때, 관료들은 답을 내놓는 데 한참이 걸렸다. 숫자들이 너무 많은 층위로 가공되어 있어서 아무도 처음 데이터가 어디서 왔는지 추적할 수 없었다. 고스콤스타트의 공식 통계 담당자들조차 진짜 수치를 몰랐다. 개혁이 기댈 진짜 숫자가 없었다. 그 층위 맨 아래 어딘가에는 이반 같은 사람이 도장을 찍은 집계표가 있었다.


소련의 붕괴를 설명할 때 역사가들은 냉전의 군비 경쟁, 아프가니스탄의 수렁, 고르바초프의 개혁 실패를 꼽는다. 그것들은 모두 사실이다. 그런데 이 나라가 그렇게 오래 버텼다는 것도 사실이다. 1930년대부터 허위 보고가 쌓이기 시작했고, 제국은 그 위에서 60년을 더 살았다. 왜 그토록 오래 버텼는가. 그것이 어쩌면 더 불편한 질문이다.

처벌이 두려운 관리자는 정확한 수치 대신 좋은 수치를 보고했다. 좋은 수치를 받은 상부는 더 높은 목표를 내려보냈다. 라리오노프만이 아니었다. 수천 명의 이반이 매일 아침 도장을 찍었다. 그들 중 누구도 나라를 망치려 하지 않았다. 다만 살아남으려 했을 뿐이었다. 모두가 합리적으로 행동했고, 그 합리성이 쌓여 나라를 망쳤다. 계획경제는 무능해서 실패한 것이 아니었다. 정확한 정보 없이는 작동할 수 없는 체계였고, 그 정보를 올바르게 생산하는 것이 처음부터 구조적으로 불가능했다. 트레믈이 미국에서 계산해낸 것을 모스크바의 누구도 계산할 수 없었던 것은 실력의 차이가 아니었다. 계산 결과를 살아서 제출할 수 없는 구조의 차이였다. 알고 있었다. 알아도 바꿀 수 없는 구조였다. 그 구조가 무너지는 소리는 총성이 아니었다.


1991년 4월, 고스플란이 해체됐다. 이반 세르게예비치는 퇴직 서류를 작성하면서 자신이 평생 서명한 집계표의 묶음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수십 년 치 숫자들이었다. 모스크바 창밖에는 다시 눈이 내리고 있었다. 새벽의 가로등이 희미하게 번졌다. 첫 도장을 찍던 그날 아침과 같은 눈이었고, 같은 어둠이었다. 이반은 묶음을 가방에 넣지 않았다. 그냥 책상 위에 남겨두었다. 어딘가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원자재 입고량을 알면서도 103퍼센트 집계표에 도장을 찍고 있을 것이었다. 거짓 숫자로 무너지는 방식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숫자 자체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서도 나라가 서서히 비어가는 방식이 있었다. 숫자가 말해주지 않는 것들이 문제인 나라. 그 나라는 모래 위에 서 있었고, 땅 아래에 신이 살고 있었다.

주석

1) 위키피디아 '랴잔 기적' 항목은 이 사건을 경제 사기(scam)로 규정하며 라리오노프의 자살을 직접 언급하지 않아, 자살 여부가 발췌로는 확인되지 않고 논란의 여지가 있다. (출처: Wikipedia: Ryazan mirac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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