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회계 40화 — 석유가 신이 된 날

세금을 낼 때 우리는 불만스럽다. 내가 번 돈을 국가가 가져간다는 느낌. 그런데 반대인 나라가 있었다. 국가가 세금 대신 돈을 뿌리는 나라. 전기세 없음, 휘발유 거의 공짜, 의료비 무료. 국민이 국가에 내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국민에게 주는 구조.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왕실이 관대해서가 아니었다. 땅 밑에 신이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신의 이름은 석유였고, 신이 살아 있는 동안 왕국은 지속됐다. 신이 침묵할 때의 이야기는 장부 어디에도 쓰여 있지 않았다.

1973년 10월의 어느 오후, 리야드 재무부 청사 4층에서 파루크 알-무사위는 계산기를 내려놓고 전보를 읽었다. 아랍 산유국들이 이스라엘 지원국에 대한 원유 수출을 전면 금지한다는 내용이었다. 수석 예산 담당관 15년, 그는 언제나 같은 숫자들과 씨름했다. 메카 순례세, 대추야자 수출액, 영국에서 빌린 차관의 이자. 배럴당 3달러. 그 숫자가 옳은지 그른지, 아람코가 정해준 대로였고 파루크는 따질 방법이 없었다. 아버지도 같은 창가에서 같은 계산기를 두드렸고, 같은 결론에 매년 닿았다. 언제나 빠듯하다. 창밖의 사막이 붉고 고요했다. 장부는 아직 같았다. 그러나 장부를 쥔 손이 달라지려 하고 있었고, 그 달라짐이 파루크의 남은 평생을 완전히 바꿀 것이었다. 어떻게 바꿀지는 한참이 지나서야 알 수 있었다. 전보를 내려놓으며 파루크는 창밖을 보았다. 사막은 여전히 붉고 고요했다.


1960년 바그다드에서 OPEC이 창설됐을 때, 산유국들은 자국 상품의 최저 가격조차 스스로 정하지 못하는 하청업체였다. 영미 메이저 석유 회사들이 세계 석유 공급의 절대적 비중을 장악했고, 배럴당 1달러대 유가는 10년 넘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중동의 지하에서 솟아오른 부는 런던과 뉴욕으로 흘렀고, 파루크가 받아 적는 로열티 숫자는 그 흐름의 잔금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납품 단가를 원청이 일방적으로 통보하면 하청이 사인하는 구조였다. 가격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어느 쪽에서도 해본 적이 없었다. 당신이 그 자리였다면 달리 생각했을까.

1973년 10월 16일, 쿠웨이트 회의에서 OPEC 걸프만 위원회가 원유 가격을 70퍼센트 인상했다(배럴당 3.01달러에서 5.11달러로). 이튿날인 10월 17일 OAPEC 회원국들이 이스라엘 지원국에 대한 수출 금지를 결의했고, 실질적 금수 선언은 미국이 이스라엘에 22억 달러 지원을 공표한 10월 19~20일 이후 이루어졌다. 배럴당 3달러였던 가격이 석 달 만에 11.65달러1)가 됐다. 거의 네 배. 파루크의 장부에 적히던 숫자들이 한꺼번에 자릿수를 바꿨다. 사우디아라비아의 GDP는 1973년 약 150억 달러에서 1981년 약 1,840억 달러로 열두 배 이상 불어났다. 처음으로 재무부 금고에 숫자가 넘쳤다. 파루크는 같은 계산기로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화면 위의 풍경이 달랐다. 아버지의 계산기였고, 아버지가 일한 같은 책상이었다. 달라진 것은 숫자였다. 그는 그 전환이 영원할 것이라 믿었다. 믿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 규모의 숫자는 구조를 만들기 마련이었고, 그 구조 안에서 의심은 사치였다.

돈이 왔다. 그리고 빠르게 쓰였다. 1970년대 사우디아라비아는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연속으로 추진했다. 포장도로 총 길이가 세 배, 발전 설비 용량은 스물여덟 배, 항만 처리 능력은 열 배. 병원과 학교가 사막 위에 올라섰고 수도관이 놓였다. 국민들은 세금을 내지 않았다. 전기요금도, 휘발유 값도 거의 공짜였다. 리터당 150원 수준으로, 한국 유가의 10분의 1이었다.

왕실은 복지를 정치 참여의 대체물로 삼았다. 정치 비판 대신 무상 의료, 선거 대신 보조금. 이 계약은 석유 수익이 유지되는 한 유효했고, 국민들은 그 교환을 받아들였다. 1980년 아람코를 완전 국유화하며 수익 전체를 손에 넣었을 때 파루크는 마침내 숫자의 주인이 됐다고 느꼈다. 복지는 이미 구조가 됐고, 보조금은 권리가 됐으며, 세금이 없는 삶은 당연한 것이 됐다. 장부가 매년 넘쳤고, 파루크는 매년 같은 계산기로 더 큰 숫자를 적었다.

풍요는 족쇄처럼 생기지 않는다. 상이 먼저 오고 족쇄는 나중에 온다. 그것이 다음 세대가 지불해야 할 비용의 이름이라는 것을,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 국민들도 몰랐다. 아무도 묻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복지가 공짜일 때 대가를 묻는 사람은 드물다. 무상 의료를 공약으로 내건 왕실에게 어떤 반대를 기대하겠는가.

석유 수익이 국가 예산의 87퍼센트를 채우는 구조가 완성됐을 때, 그것은 동시에 위험 전체를 한 곳에 쌓는 일이기도 했다. 배럴당 36달러였던 유가가 1986년 14달러로 주저앉으며2) 재정에 구멍이 났다. 2014년에는 재정 균형을 맞추기 위한 적정 유가로 106달러가 필요했는데 실제 국제유가는 2015년 말부터 2016년 초에 걸쳐 30달러선까지 떨어졌다. 지금으로 치면 생활비를 감당하려면 월 500만 원이 필요한데 통장에 들어오는 돈이 150만 원인 구조였다. 파루크의 계산기를 이어받은 후배들은 전혀 다른 종류의 압박과 마주했다. 수입이 늘어날수록 국민의 기대도 함께 올라가는 구조에서, 줄인다는 선택은 허락되지 않았다. 3세기 전 아메리카의 은이 스페인 왕실을 먹이던 시절처럼, 자원이 넘쳐날수록 그 자원에 종속되는 구조가 깊어졌다. 줄이려 하면 거리로 나올 것이고, 늘리려 하면 석유 가격이 협조해야 했다. 국가의 재정 의지가 지하의 석유층 두께에 달려 있었다. 파루크가 수석 담당관이 된 날부터 끝내 따질 수 없었던 숫자가 있었는데, 그것은 배럴당 가격이 아니라 이 구조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의 칸은 어떤 장부에도 없었다. 계획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계획을 세울 수 없게 설계된 것이었다.


1973년의 금수 조치는 정치적으로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미국은 이스라엘 지원을 멈추지 않았고, 팔레스타인의 상황도 달라지지 않았다. 겉에서 보면 실패였다. 그런데 세계는 그 실패를 보면서 조용히 다른 계산을 시작했다. 배럴당 12달러로 가격이 뛰는 것을 본 서방 국가들은 에너지 안보를 재설계하기 시작했다. 북해 유전을 개발했고, 알래스카 파이프라인을 놓았으며, 핵발전소 건설을 가속했다. 석유를 무기로 꺼내 든 순간, 그 무기에 맞설 면역을 키우는 긴 과정이 시작된 것이었다. 오일쇼크로부터 십 년이 지나자 서방 세계의 에너지 소비 효율은 뚜렷하게 향상됐다. 석유 무기의 날이 무뎌지는 비용은 결국 산유국들이 치렀다.

사우디아라비아는 그것을 몰라서 멈추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석유 수익으로 구축한 복지 구조는 되돌리기 어려웠고, 왕실은 그 기대를 거두어들일 수 없었다. 2011년 아랍의 봄이 중동을 흔들 때 압둘라 국왕은 귀국 당일(2월 23일) 360억 달러 규모의 복지 패키지를 한꺼번에 발표했다. 정치 개혁 대신 현금이었다. 그것이 가능했던 것도 석유 때문이었고, 그것 외의 방법을 떠올리지 못한 것도 석유 때문이었다. 선택지가 없는 것이 아니라 선택할 수 없게 설계된 구조였다.

파루크는 정년을 앞두고 장부를 들여다보며 이상한 것을 느꼈다. 수입이 늘어날수록 지출은 더 빠르게 늘었고, 국민의 기대는 수익보다 먼저 올라갔다. 국가의 재정 의지가 지하의 석유층 두께에 달려 있었다. 파루크는 처음으로 장부를 덮으며 생각했다. 이것은 국가 재정이 아니었다. 날씨 예보였다. 그리고 이 나라는 날씨를 고를 수 없었다.


2016년 비전 2030이 선언됐다. 석유 없이 먹고사는 나라를 만들겠다는 계획, 사십 년 만에 나온 질문이었다. 사막에서 묻지 않은 질문은 사막처럼 오래 남는다. 파루크는 정년 후 옛 동료를 만나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배럴당 3달러를 받을 때는 나라 살림을 걱정했지. 열두 배가 됐을 때는 더 크게 걱정하게 될 줄 몰랐어. 그가 1973년 전보를 받아 든 날, 창밖의 사막은 붉고 고요했다. 숫자가 자릿수를 바꾸는 그 순간에도 사막은 달라지지 않았다. 지금 그 사막 위에서 크레인들이 돌아가고 있고, 그 크레인들이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는 아직 장부에 적히지 않았다.

주석

1) Wikipedia '1973년 오일 위기' 항목에 따르면 1973년 엠바고 이후 유가는 배럴당 약 3달러에서 약 12달러로 약 300% 상승했다고 기술되어 있어, 본문의 11.65달러 도달 시점(석 달)이나 최종 수치와 미세한 편차가 존재한다. (출처: Wikipedia: 1973 oil crisis)

2) Wikipedia '1979년 오일 위기' 항목은 1980년대 중반까지 유가가 지속 하락했다고 서술하며 구체적 수치로 언급하지 않아, 본문의 '1986년 14달러'가 정확한지 독립적으로 검증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논쟁의 여지가 있다. (출처: Wikipedia: 1979 oil cri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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