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회계 41화 — 하나의 통화, 둘의 운명

룸메이트 두 명이 한 통장을 쓴다고 상상해보자. 공과금, 인터넷, 관리비를 같이 낸다. 문제는 한 명은 고소득 직장인이고 다른 한 명은 아르바이트생이라는 것이다. 같은 금액을 낼 때 한 명은 여유롭고 다른 한 명은 허덕인다. 그래서 둘은 비율을 정하기로 했다. 비율은 어떻게 정하는가. 협상이다. 협상은 힘센 쪽에 유리하고, 불만이 쌓이면 다음 달 공과금 전에 또 싸워야 한다. 이것이 두 나라가 하나의 통화를 나눠 쓸 때 생기는 일의 가장 단순한 형태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은 이 싸움을 10년마다 반복하기로 조약에 명시했다.

1867년 봄, 부다페스트 왕궁의 재무 서기 바르가 야노시는 빈에서 막 도착한 공문을 책상에 펼쳤다. 대타협, 아우스글라이히.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하나의 제국 안에서 각자의 정부를 갖기로 합의한 조약이었다. 문서의 한 줄에 그의 손가락이 멈췄다. 공동 지출 분담 비율. 오스트리아 70, 헝가리 30. 헝가리 인구는 제국 전체의 약 41퍼센트에 달했다. 그런데 분담금은 30퍼센트다. 창밖으로 도나우 강이 저녁 빛을 받아 느리게 흘렀다. 야노시는 다음 조항으로 시선을 내렸다. 10년마다 재협상. 숫자가 합의됐다는 것은, 그 숫자가 언젠가 다시 싸워야 할 전쟁터가 된다는 뜻이었다. 그는 문서를 서랍에 넣었다. 헝가리가 얻은 것은 분명했다. 잃은 것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1867년 대타협이 만들어낸 것은 국가가 아니었다. 조약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이중제국은 두 개의 의회, 두 개의 정부, 두 개의 예산, 두 개의 관세청을 가졌지만 군주는 한 명, 화폐는 하나, 군대는 하나였다. 이 구조의 골조는 쿼터 시스템이었다. 외교부, 국방부, 공동재무부—세 공동 부처의 운영 비용을 두 나라가 비율에 따라 나눠 냈다. 초기 비율은 70대 30이었지만 10년마다 재협상해야 했고, 그때마다 제국 전체가 흔들렸다. 1877년, 1887년, 1897년, 1907년—네 차례 협상은 모두 위기였다.

헝가리는 매번 비율 인상에 저항했고, 오스트리아는 헝가리의 경제 성장을 근거로 부담을 늘리려 했다. 1907년 협상은 특히 격렬했다. 헝가리 의회가 공동 부처 예산안 심의를 무기한 거부하자 공동 군대의 장교 임명이 수개월째 동결됐다. 빈의 육군부 복도에서 브리핑을 기다리던 장교들이 빈손으로 돌아가야 했던 것은 전쟁 때문이 아니라 쿼터 협상 때문이었다. 그해 헝가리의 분담 비율은 36.4퍼센트까지 올라갔지만, 협상 과정에서 두 정부는 서로를 인질로 잡은 채 공동 예산을 마비시켰다. 지출 협정이 없으면 공동 군대에 예산이 배정되지 않았고,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칙령으로 군사비를 집행했다. 합헌과 위헌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제국이었다. 봉합이 반복된다는 것은 구조가 버티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고, 다음 균열이 더 깊어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당신이 그 구조 안에서 일하는 서기였다면, 봉합이 이루어질 때마다 안심했을까, 아니면 서랍이 닫힐 때마다 다음 협상까지의 날수를 세었을까.

두 번째 균열은 더 조용히 왔다. 하나의 화폐인 오스트리아-헝가리 크로네는 두 경제의 다른 체력을 하나의 환율로 묶었다. 헝가리 농업 지대는 밀 수출에 세수 상당 부분을 기댔는데, 국제 밀값이 폭락하는 해에는 부다페스트 재무부가 공동 분담금을 정시에 납입하지 못하는 일이 반복됐다. 헝가리 농민이 흉작으로 빚을 질 때, 빈의 공장주는 같은 통화로 수출 대금을 받았다. 제국 중앙은행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은행은 두 나라의 요구를 동시에 충족시켜야 했지만 금리는 하나뿐이었다. 헝가리 측은 경기 부양을 위해 금리를 내리길 원했고, 오스트리아 측은 물가 안정을 이유로 반대했다. 이사회 회의록이 두 언어로 작성됐고, 표결은 항상 아슬아슬한 과반으로 끝났다. 지금으로 치면 유럽중앙은행이 독일 경제에 맞춘 금리를 그리스 농민에게도 똑같이 적용하는 것과 같다. 같은 숫자, 다른 현실. 그 간격이 매년 조금씩 벌어졌다.

세 번째 균열은 가장 오래됐고 가장 무거웠다. 이중제국 안에는 열한 개 민족이 살았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는 대타협에서 이 민족들의 자치 요구를 봉인하는 데 암묵적으로 합의했다. 체코인은 오스트리아 의회에서 발언할 수 있었지만 예산 편성권은 없었다. 슬로바키아인은 헝가리 행정구역 안에서 자국어 교육을 제한받았다. 소수 민족은 세금은 냈지만 예산 배분에서는 배제됐다. 1890년대 보헤미아의 체코 직물공들은 오스트리아 산업 지대의 성장을 떠받치는 세수를 냈지만, 그 세금이 체코어 학교 건설에 쓰인 적은 없었다. 세금 대장에 이름이 올라 있는데 예산 회의에는 의석이 없다는 것. 쿼터 비율이 아무리 정교하게 협상됐어도, 그 표에 이름이 없는 사람들의 분노는 표에 적히지 않았다. 야노시의 후배들이 서랍을 열고 닫으며 분담 비율을 계산하는 동안, 제거된 항목들이 봉인 안에서 쌓이고 있었다. 숫자가 보이지 않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만들 때, 그 보이지 않는 것들이 쌓여 반드시 보이는 형태로 돌아온다.


그런데 이 세 균열이 각각 심화되는 동안, 제국은 계속 버텼다. 봉합이 가능한 한 무너지지 않았다. 40장의 파루크가 석유 수익이 줄어도 복지 구조를 되돌릴 수 없었던 것처럼, 이중제국의 정치인들도 진단을 손에 들고 있으면서 처방을 거부했다. 재정을 완전히 통합하거나, 아니면 통화를 따로 쓰거나. 둘 다 불가능했다. 완전 통합은 헝가리가 거부했고, 통화 분리는 오스트리아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남은 선택지는 하나였다. 10년마다 싸우면서 봉합을 반복하는 것. 그리고 그 봉합을 모두가 선택했다.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바꿀 수 없는 구조가 있었다. 야노시가 서랍을 여는 이유가 청구서가 도착했기 때문이라면, 서랍을 다시 닫는 이유는 그 청구서를 지금 치를 수 없어서였다. 청구서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것이 이 이야기의 핵심이다.

1918년 11월, 이중제국이 해체됐을 때 하나였던 화폐는 주요 후계 국가들—오스트리아,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그리고 영토 일부를 승계한 폴란드와 이탈리아—사이에서 분열됐다. 각국은 자국 영토 내 지폐에 도장을 찍거나 색선을 그어 화폐를 급조했다. 빈과 부다페스트의 재무부 서기들에게 그날은 회의록의 마지막 줄에 아직 서명이 없는 채로 남은 날이었다. 서랍 안의 문서들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그것들을 처리할 제국은 이미 없었다.

1999년 1월 1일, 유럽 11개국이 단일 화폐 유로를 도입했다. 마스트리흐트 조약 협상 테이블에서 경제학자들이 제출한 경고문은 두꺼웠다. 재정 동맹 없는 통화 동맹은 작동하지 않는다. 이중제국이 50년간 실험하고 1918년에 제출한 결론이었다. 경고는 두꺼운 서류 묶음 안에 있었다. 정치인들은 그 묶음을 서랍에 넣었다.

2009년 10월, 아테네 재무부에서 새로 취임한 총리가 전임자의 서류를 넘기다 손을 멈췄다. 기존 정부의 공식 신고치를 크게 웃도는 GDP의 12.7퍼센트에 달했고, 이후 유로스타트의 최종 검증을 거쳐 확정된 실제 재정 적자는 15.4퍼센트1)였다. 그리스는 유로화를 썼다. 드라크마를 발행하거나 환율을 조정할 권한이 없었다. 2000년대 초반 그리스는 독일과 같은 저금리로 자금을 빌렸고, 정부는 빌린 돈으로 공공 지출을 늘렸으며, 수치가 기준을 넘을 때마다 통계를 다듬었다. 야노시가 서랍에 넣어두었던 문서처럼, 그 숫자들도 언젠가 반드시 다시 꺼내져야 할 청구서였다. 서랍이 열렸을 때, 제도는 이중제국과 같은 방식으로 응답했다. 2012년 7월, 유럽중앙은행 총재가 "유로화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하겠다"고 말했다. 황제의 칙령이 예산 마비를 메웠던 것처럼, 이번엔 중앙은행 총재의 발언이 제도 설계의 공백을 덮었다. 봉합은 지금도 계속된다.


야노시는 그날 저녁 서랍을 닫으며 도나우 강을 다시 바라보았을 것이다. 저녁 빛이 걷히고 강이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그의 손가락 끝에는 아직 문서의 감촉이 남아 있었다. 두꺼운 종이, 잉크 냄새, 분담 비율 옆에 새겨진 세 글자. 10년마다. 그 세 글자가 자신의 일생보다 오래 살아남으리라는 것을, 아마 그는 알았을 것이다. 도나우 강은 오늘도 흐르고, 아크로폴리스는 아테네 위에 서 있으며, 유럽중앙은행의 이사회는 다음 달에도 회의록을 스물세 개의 언어로 작성할 것이다. 서랍 안에는 아직 서명이 없는 협상들이 있다. 에필로그는 바로 거기서 시작된다.

주석

1) 그리스 재정위기를 다룬 학술 논문은 2009년 11월 이후 그리스의 재정 적자와 공공부채가 지속 불가능한 수준임이 드러났다고 서술하며, 유로스타트 최종 검증치로 알려진 GDP 대비 15.4%라는 수치에 대해 직접 확인하거나 이견을 제시하지 않고 있어 단일 출처 수치의 정확성 논란이 남는다. (출처: The Greek crisis: Causes and implications,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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