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나
2026년 여름, 월가의 투자은행 제프리스(Jefferies)는 AI 모멘텀 장세에서 소외된 고품질 저변동 종목들을 주목하라는 권고를 내놓았다. S&P 500 지수에서 엔비디아(NVIDIA)를 포함한 AI 수혜주 10개 종목이 2025년 한 해 시가총액 상승분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동안, 나머지 490개 종목의 평균 주가수익비율(PER, 주가를 주당순이익으로 나눈 값으로 주식이 얼마나 비싼지를 보여주는 지표)은 역사적 평균인 16배를 밑도는 수준까지 낮아졌다. 쏠림이 깊어질수록 반대쪽 그늘도 짙어진다.
숫자가 드러내는 균열: AI 집중과 나머지 시장의 괴리
AI 테마 종목들의 과열 정도를 가늠하는 가장 직관적인 잣대는 '시장 집중도'다. 2026년 상반기 기준, S&P 500 상위 10개 종목이 전체 지수 시가총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약 36%에 달한다. 이는 닷컴 버블 정점이었던 2000년 3월의 27%를 훌쩍 넘어선 수치다. 지수가 오르는 것처럼 보여도 그 과실이 극소수 종목에 집중되어 있다는 뜻이다.
반면 제프리스가 주목한 '소외된 고품질주'들의 면면을 보면, 부채비율이 업종 중앙값의 절반 이하이고 최근 3개년 자기자본이익률(ROE, 투자한 자본으로 얼마나 이익을 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이 15% 이상인 기업들이다. 이들의 주가는 AI 장세가 본격화된 2023년 초 이후 평균 8% 상승에 그친 반면, 같은 기간 필라델피아 반도체 지수는 170%가 넘게 올랐다.
통념과 정반대인 수치가 하나 있다. 변동성이 낮은 주식이 장기적으로 변동성이 높은 주식보다 수익률이 낮을 것이라는 상식은 실증 데이터로 뒷받침되지 않는다. 1990년부터 2023년까지 MSCI 세계 최저변동성 지수(MSCI World Minimum Volatility Index)의 연평균 수익률은 10.2%로, 모지수(8.9%)를 1.3%포인트 웃돌았다. 쏠림이 극단에 달한 시기에 소외된 종목들은 종종 다음 사이클의 씨앗을 품고 있다.
1999~2000닷컴 버블이 남긴 교훈: 소외된 가치주의 귀환
1999년 말, 시스코(Cisco)와 퀄컴(Qualcomm)의 주가는 각각 연간 300%, 2,600% 폭등했다. 워런 버핏이 이끄는 버크셔 해서웨이(Berkshire Hathaway)는 같은 해 주가가 24% 하락하면서 언론으로부터 "구시대의 공룡"이라는 조롱을 받았다. 당시 가치주(수익·자산 대비 주가가 낮은 주식)와 성장주(미래 이익 기대감에 주가가 높은 주식)의 가치평가 격차는 역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하나 있다. 2000년 3월 나스닥 붕괴 직후, 시장에서 가장 빠르게 회복한 섹터는 기술주가 아니라 에너지와 금융주였다. 2000년 3월부터 2002년 10월까지 나스닥이 78% 폭락하는 동안, S&P 500 에너지 섹터는 오히려 14% 상승했다. 소외의 시간이 길수록 반등의 폭도 컸다.
오늘의 장면과 구조적으로 닮은 점은 분명하다. 당시에도 새로운 기술 패러다임(인터넷)에 대한 기대감이 특정 섹터로 자금을 빨아들이는 동안, 나머지 시장은 상대적 저평가 상태로 방치되었다. 차이는 속도와 밀도였고, 공통점은 결국 평균 회귀(mean reversion, 극단적으로 벌어진 가격 차이가 장기 평균으로 돌아오려는 경향)가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무엇이 다른가: AI의 실질 수익과 닷컴의 허상
닷컴 버블과 현재 AI 장세 사이에는 결정적인 구조적 차이가 있다. 2000년 당시 인터넷 기업 상당수는 매출조차 없는 상태에서 상장되었다. 그러나 엔비디아의 2025 회계연도 순이익은 전년 대비 581% 증가한 296억 달러(미국 전체 반도체 업종 수익의 약 40%)를 기록했다. 과열은 맞지만, 실적 공백 위에 쌓인 모래성은 아니다.
그러나 이 차이가 소외된 고품질주의 저평가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AI 인프라 투자의 과실이 실제 기업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지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역사적으로 범용 기술(GPT, General Purpose Technology) 도입 이후 생산성 통계에 반영되기까지 평균 10~15년이 걸렸다. 전기는 1880년대에 상용화되었지만, 공장 생산성에 본격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설비 교체와 노동자 적응이 진행된 1920년대 이후였다.
앞으로 가능한 시나리오
첫 번째 경로는 점진적 순환(rotation)이다. AI 수혜주들의 밸류에이션 부담이 누적되고 연준(Federal Reserve)의 금리 경로가 안정화될 경우, 안정적 현금흐름을 보유한 소외된 고품질주로 자금이 서서히 이동한다. 이 경우 시장 전체가 무너지지 않으면서 섹터 간 수익률 격차가 좁혀진다. 연준이 2026년 하반기에 기준금리를 0.5%포인트 이상 인하할 경우 이 경로의 가능성이 높아진다.
두 번째 경로는 현상 유지다. AI 관련 기업들의 실적 서프라이즈가 계속되고 글로벌 자금이 미국 기술주 집중을 이어갈 경우, 소외된 종목들의 상대적 부진은 2026년 내내 지속된다. AI 인프라 지출이 분기당 10% 이상 증가세를 유지하는 한 이 경로는 힘을 잃지 않는다.
세 번째 경로는 급격한 조정이다. AI 수혜주들의 밸류에이션이 기업 실적으로 정당화되기 어려운 수준까지 부풀어 오른 상태에서 외부 충격(지정학적 긴장 고조, 예상치 못한 인플레이션 재가속)이 발생하면 고PER 종목부터 매물이 쏟아진다. 닷컴 때와 달리 이번에는 낙폭이 제한적일 수 있지만, 그 충격을 가장 작게 받는 쪽은 지금 소외된 저변동 종목들일 가능성이 크다. 나스닥 선물 변동성 지수(VIX)가 25를 넘어서는 시점이 이 경로의 신호가 된다.
독자가 기억해야 할 한 문장
AI 수혜주 상위 10개 종목의 평균 PER이 역사적 평균(16배)의 3배를 넘어서고, 동시에 미국 10년물 국채 금리가 다시 5%를 상회한다면, 그것은 고품질 소외주로의 자금 이동이 본격화되는 구조적 전환점의 신호로 읽어야 한다.
참고자료
MSCI — Minimum Volatility Indexes